경북 상주 노음산 계곡을 따라 거슬러 오르니 남장사다.
아담하고 정결한 절 입구에서부터 길손을 맞이하는 꽃이 눈에 띈다.
무궁화다.
일주문 안 곳곳에도 무궁화가 웃고 있다.
을사보호조약(1905년) 직후 남장사에 온 조선의 관리가 있었다.
고종을 보필하던 정4품인 궁내부 주서 이종국이었다.
18살에 진사과에 합격해 관직에 나아간 준재로 우의정의 딸을 규수로 맞아들였으니
평탄한 나라였다면 그만한 복록도 없었으리라.
그러나 망국의 다리를 건넌 기막힌 현실에 동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해외 망명길에 나섰다.
그는 나라와 자신의 길이 다한 곳에서 불도를 열었다.
그가 혜봉 선사(1874~1956)다.
혜봉은 이런 속세의 신분을 감춘 채 치열한 구도에 나섰다.
이미 사서삼경과 같은 유학에 통달했던 혜봉은 불경의 요지를 꿰뚫었다.
이어 본격적인 참선에 들어갔다.
직시사에선 곡기를 끊고 솔잎 가루로 연명하는 <벽곡>을 감행했다.
이 때 궐내에서 그의 인품을 우러르던 상궁과 나인들이 직지사로 시봉하러 찾아오자
그는 자취를 감춰 버렸다.
혜봉은 멀리 함경도 안변 석왕사를 거쳐 경허 선사의 맏상좌인 수월 선사를 찾아 법거량을 벌였다.
이 때 글을 모르는 수월은 선객들에게 <선문촬요>를 강의하도록 혜봉에게 청했다고 한다.
혜봉이 통도사에 머물 때는 한 유생이 찾아왔다.
전 세계에 선불교를 알린 숭산 선사의 스승 고봉 선사였다.
양반으로서 안하무인이었던 고봉은 통도사에 들어서서도 거드름을 피우며
“여보게, 거 누가 내 머리카락 좀 깎아주게나!”라고 반말지거리를 늘어놓았다.
그 때 승려들이 고봉을 데리고 간 곳이 혜봉의 처소였다.
혜봉 앞에서 고봉은 순한 양이 되어 부엌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불문에 들었다.
혜봉은 팔공산 동화사 금당선원 조실을 거쳐 남장사 관음전 조실로서
선·교를 넘나들며 납자들의 뭣을 깨웠다.
동국대 대학원장을 지낸 한국 불교학의 태두 뇌허 김동화 박사(1902~80)도 그가 길러낸 제자다.
그러나 조선의 지사로서 늑대의 먹잇감으로 전락한 동포와 민족의 모습을 어찌 한시인들 잊을 수 있었으랴.
남장사 보광전의 철불상인 비로자나불(보물 990호)은
‘병란이나 심한 가뭄이 들면 스스로 땀을 흘린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혜봉은 이 철불 위 천장에 태극기를 그려두고 민족의 해방을 발원하고 또 발원했다.
그의 애국 정신을 본뜬 제자들은 한결 같이 3·1만세 등 독립운동에 나서 감옥에 가거나 고문을 당했다.
그런 제자들의 전력 때문에 일본 순사들은 늘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혜봉이 “제발 가문의 대만 이어 달라”는 간청을 거절치 못하고 떨어뜨린 일점 혈육이
1955년부터 최근까지 조계종 비구니회 회장으로서 비구니들의 어머니 역할을 해온 광우스님(79)이다.
14살 때 남장사로 출가했던 광우는 혜봉이 늘 끼고 있던 서첩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혜봉이 손수 글을 써서 만든 서첩으로 한쪽엔 불경이
반대쪽엔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가 빼곡히 적혀 있다.
광우는 순사들이 들이닥치면 큰스님이 고초를 겪을 것이 우려돼
난중일기 부분을 뜯어내 버렸다가 나중에 혜봉에게 들켜 큰 꾸중을 들었다.
또 한국 불교를 왜색화한 총독 미나미가 개최한 31본산주지회의에서
호통을 치고 나온 만공선사에 대해 ‘할의 소감’이란 글로 칭송했고,
그의 방엔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戍命)'
(눈앞에 이익이 보일 때 의리를 생각하고, 나라의 위태함을 보고는 목숨을 바쳐라)이라는
안중근 의사의 글을 걸어두었다.
일제가 대동아전쟁을 일으켜 일본의 힘이 영구할 것 같아
많은 이가 매국으로 일신의 안녕을 도모할 때도 혜봉은
남장사를 찾아온 지사와 일본 유학생들에게
“일본의 끝이 다 와 간다”며 용기를 북돋웠다.
일제의 패망으로 해방을 맞은 뒤엔 옛 궁의 동료들이 조선왕조 복고에 앞장서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석양이 노음산을 넘는다.
아침에 피었던 무궁화도 다시 지기 시작한다.
무상한 일이다.
하지만 모두가 조국의 현실을 절망할 때 희망을 노래하고
다시 옛 왕조의 전설에 집착할 때
단호히 허망함을 직시한 혜봉이 심은 무궁화가 말 없는 법문을 하지 않는가.
태양은 아침에는 다시 떠오르고, 무궁화도 다시 피어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