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성난 폭풍우가 훑고 지나간 때문일까.
산색이 맑다.
특히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은 가야산 나무들의 기상이 높다.
해인사의 한가한 뒷방에서 극락전 한주 도견스님(80)이 맞는다.
가야산 나무들을 키우고 지켜냈던 ‘산감’ 지월 선사(1911~73)의 맏상좌(첫제자)다.
일찌기 명예욕을 벗은 그의 스승은 방장이나 조실이 아니라
사찰에서 산을 지키고 가꾸는 직책인 산감을 자처했다.
산승이었다.
도견스님은 19살 때 오대산 동관음암으로 출가했다.
스승은 그에게 무엇 하나 시키는 법이 없었다.
밥도 반찬도 스승이 몸소 만들어 제자에게 바쳤고
제자가 목욕하러 들어가면 벗어놓은 옷까지 빨아 놓았다.
7개월 뒤 동관음암을 찾았던 스승의 도반이 그 모습을 보고
눈물이 쏙 빠지도록 꾸중할 때까지 도견은
중들이 사는 게 다 그런 줄만 알았다.
극락전 건너편엔 해인사 행자실이 있다.
갓출가한 이들이 매웁디 매운 절 시집살이를 감내하며 중물을 들이는 첫 관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승려를 배출하는 해인사 행자실의 ‘군기’는
방장이나 주지도 어쩌지 못하는 치외법권 지대다.
특수부대의 3년 훈련은 견뎌도 해인사 행자생활 반년은 견딜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치외법권 지역에 유일한 ‘법’이 있다.
하심(下心)이라고 지월이 쓴 글씨다.
불상도 아닌 족자 앞에 향불이 피워져 있다.
행자실에선 ‘하심’이 ‘부처’다.
행자들은 불상 대신 이 족자 앞에서 계를 받는다.
‘자신을 낮추고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야말로
수행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인 때문이다.
훈련병처럼 눈빛이 살아있는 행자실 반장 현산 행자는
“처음 이 절에 들어오는 행자들은 누구나 지월 큰스님의 하심을 먼저 배운다”고 말했다.
지월은 말년에 해인사에서 20여 년을 보냈다.
수좌(선승)인 불교환경연대 대표 수경스님은 승가에 한없이 실망하다가도
지월을 떠올리면 “출가하길 참 잘 했다”는 생각이 들며 저절로 옷깃이 여며진단다.
지월은 상대가 늙거나 어리거나 남자거나 여자거나
누구를 막론하고 합장한 채 고개를 깊이 숙였다고 한다.
상대가 고개를 들고 다시 숙이고 3~4번을 반복할 동안에도 지월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지월은 해인사를 찾는 객스님의 바랑을 들어주며 출가 본사와 은사 스님을 물었다.
그리고 “보살은 참으로 거룩한 도량에서 오셨습니다.
보살은 참으로 거룩한 스승을 두셨습니다.
이제 할 일은 공부뿐입니다”라고 했다.
귀찮은 마음에 거드름을 피우며 법명을 묻던 객스님은
그가 가야산에서 성철 선사가 유일하게 존대해 마지 않던
지월인 것을 알고는 자지러지게 놀라곤 했다.
누구에게나 ‘보살’이라고 불렀던 그의 겸허와 자비는 범인의 경계가 아니었다.
한 손님이 꾀죄죄한 누더기를 걸친 지월의 뺨을 때리자
지월은 얼른 그의 손을 쥐고 “얼마나 아프냐”고 했고,
말과 표정과 행동이 한 치의 어그러짐 없이 진실하기만 했던
천진한 그 모습을 본 그 손님이 눈물을 흘리며 대참회를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승려들도 초심이 흔들리고 독신 출가자의 고독한 삶에 크게 방황하기도 한다.
“고래등 같은 지붕 아래서 거울 같은 장판 위에서
백옥 같은 쌀밥을 먹으며 해탈을 위해 정진하는 우리가
공부 말고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지월은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이 말을 되풀이했다.
승려들은 느리지만 온 가슴의 정성이 담긴 그의 말을 듣고선 가슴이 뭉클해져
현실에 대한 불만을 놓고 다시 수행 정진할 마음을 내었다.
지월이 처음부터 그런 ‘보살’은 아니었다.
전북 남원에서 태어나 15살에
조계종 초대 총무원장을 지낸 지암 이종욱 스님에게 출가한 그는
이름난 괴각(괴팍한 승려)이었다.
키가 작았지만 차돌멩이처럼 단단하고 성정이 불같았던 그는
얼마나 싸움질을 했던지 삭발한 머리통이 상처투성이였다.
금강산 마하연과 덕숭산 정혜사 만공 선사 회상에서 공부할 때도
그는 대중들에게 쌍욕을 해댔다.
지월은 계율에 철저했던 오대산의 한암 가풍과 달리 자유로웠던 만공을 치받기 일쑤였다.
어느 날 지월은 사람들이 생불로 떠받들던 만공의 행실을
공개적으로 힐난한 뒤 어디론가 사라졌다. 3
일 뒤 한 승려가 산 위에서 서쪽을 향해 합장을 한 망부석을 발견했다.
지월이었다.
산문을 박차고 나간 뒤 그 자리에서 그대로 3일 동안 삼매에 들어
전혀 다른 경계를 체험한 것이다.
‘휴휴경휴휴 만해상파정(한 생각을 놓고 또 놓아버리니 온 바다의 파도가 고요하도다)’
지월은 만공에 대한 분별과 시비마저 놓아버린 그 자리에서
전혀 다른 보살의 세계를 열었다.
전북 완주 수봉산 요덕사 선승 대선 스님(65)은 수덕사 방장 벽초 선사가
“진승?(진짜중?) 지월 스님이 진승이지”라고 했던 말을 잊지 못한다.
만공의 제자인 벽초는 누구라도 큰스님입네 도인입네 하는 꼴을 봐주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감히 벽초 앞에선 큰스님 행세를 할 수 없었다.
그런 벽초가 자신이 유일하게 부처님처럼 존경하는 만공을 힐난한 지월을
‘진승’으로 꼽았으니 어찌 범인의 경계로 헤아릴 수 있을까.
‘달(깨달음)’을 말하는 설법이 넘치는 세상이다.
그러나 정작 달로 안내하는 나침반과 손가락은 없다고 한탄한다.
이제 어디에서 ‘달을 가리키는’(지월) 나침반을 찾을 것인가.
해인사 뒷방 한주의 얼굴은 맑고
행자들의 숙인 고개는 깊고
가야산의 나무는 높고 푸르다.
▲ 해인사 행자반장 현산 행자가
“지월 선사가 쓴 이 글씨가 행자들의 행동규범”이라고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