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람 중에 혹은 극락정토와 교주(敎主) 미타(彌陀)를 부인(否認)하면서
유심(唯心)이 정토(淨土)인데 유심 외에 무슨 정토가 따로 있으며,
자성(自性)이 미타(彌陀)인데 자성 외에 무슨 미타가 또 있겠는가. 하여 오해하는 이가 있다
이에 대한 선덕(先德)들의 가려 밝힌 중에서 몇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왕룡서거사(王龍舒 居士)의 설(設)
참선하는 사람들이
“유심정토(唯心淨土) 자성미타(自性彌陀)”를 주장하여
극락세계를 부인하려는 이가 있으나 그것은 그릇된 생각이다.
왜냐 하면 서방정토가 이치도 있고 사실의 형적도 있는 것이니
그 이치로 말하면 능히 그 마음을 깨끗하게 하므로 일체가 모두 청정하니
진실로 유심정토가 되는 것이요.
사실의 형적으로 말하면 실로 극락세계가 있어서
부처님께서 틀림없이 자세히 말씀하셨으니 어찌 헛된 말씀이라 하랴.
사람마다 성불할 수 있는 것이며 또 자성미타란 말도 거짓말이 아니다.
그러나 갑자기 이에 이를 수가 없는 것이니
마치 불상(佛像)을 조각할 만한 좋은 재목이 있더라도
불상을 조각한 연후에야 비로소 불상이라 칭할 것이요.
재목을 그대로 두고 불상이라고 예배 공양할 수는 없는 것 같은 것이니
소위 유심(唯心)이 정토니 따로 정토가 없고
자성(自性)이 미타니 따로 미타가 없다는 것은 옳지 못한 주장이다.
또 어떤 이는 정토가 있는 것을 믿으면서도
유심설(唯心設)에 구애되어 서방에 왕생할 것이 없다하거나
참선은 직접으로 견성(見性) 성불(成佛)하는 것이므로 아미타불을 볼 것이 없다는 말은
모두 잘못된 주장이다.
왜냐 하면 저 서방 정토는 탐(貪). 연(戀), 진(瞋), 치(癡)가 없거니와
우리의 마음에도 탐, 연, 진 ,치가 없는가.
또 서방 정토에는 옷을 생각하면 옷을 얻고 음식을 생각하면 음식을 얻으며
고요하고자 하면 고요하여지고 가고자 하면 가는 것이지마는
내가 옷을 생각하여 얻지 못하면 찬 것이 마음을 고달프게 하며
음식을 생각하여 얻지 못하면 주림이 마음을 고달프게 하며
고요하고자 하다가 고요할 수 없으면 흩어져 움직이게 하는 것이 마음을 고달프게 하고
가고자 하다가 갈 수 없으면 계루(繫累)가 마음을 고달프게 하니
소위 유심정토라 함은 진실로 이르기 쉽지 못한 것이다.
아미타불은 복혜(福慧)가 충분히 갖추시고 신통(神通)이 광대(廣大)하여
지옥을 변하여 연화를 만드시는 일이 손바닥을 뒤집기보다 쉽고
한이 없는 세계를 보시는 것이 눈앞에 있는 것 같거늘
나는 항상 숙업(宿業)이 깊고 무게가 있어 지옥에 떨어질까 두려워하거늘
어떻게 연화로 고쳐 만들 수 있으며
또 벽 사이의 거리의 일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한이 없는 세계를 볼 수 있으랴.
소위 자성미타라 함은 참으로 이르기가 어려운 것이므로
나의 마음이 정토가 될 수 있다 하나 별안간에는 정토가 될 수 없는 일이고
나의 성품이 가히 아미타불이 될 수 있다 하나 갑자기는 될 수 없는 것이거늘
어찌 정토를 소홀히 생각하고 닦지 아니하며
아미타불을 버리고 뵈옵기를 원치 아니 하리요.
정토의 업(業)을 닦아서 아미타불을 뵈옵고 보리(菩提)를 이루기는 어렵지 않거니와
만약 이 세계에서 참선(叅禪)하여 견성(見性) 성불(成佛)하기는 매우 어려울 뿐 아니라
정토를 수행하는 것이 참선에 방해되지 않거늘
어찌하여 참선하는 이는 정토를 소홀히 여기고 닦지 아니하겠는가.
[대아미타경(大阿彌陀經)]에 말씀하시기를
“시방(十方)의 한량이 없는 보살이 있어 아미타불국에 왕생하였다”하였거늘
나는 어떠한 사람인데 정토에 왕생하기를 원치 아니하니
내가 과연 모든 보살보다 뛰어났다고 생각하는가.
통틀어 말하면 [유심정토와 자성미타]란 말은 많은 사람을 그르치는 것이니라.
즉 정토법문을 지송(持誦)수행하면 사람마다 반드시 정토에 낳아서 속히 윤회(輪廻)를 벗을 것이니
저 거짓과 불성실한 마음이 있는 이로부터 그 거리의 먼 것이 천지(天地)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2). 성암대사(省庵大師)의 설(設)
누가 묻기를“즉심시불(卽心是佛)인데 어찌하여 다시 아미타불을 보려는가.” 하였더니 답하기를
“즉심시불이란 말은 얼음을 가리켜 물이라 하는 말과 같다
즉 얼음이 비록 물이기는 하나 물이 얼어붙었으므로
태양의 열을 빌려서야 비로소 녹아 풀어져서 물이 되는 것과 같이
마음이 불(佛)이기는 하나 전체가 어지럽고 어두움 속에 있으므로
불일(佛日)의 힘을 빌려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거늘
어찌 사리에 어두운 마음만을 고집하고 부처님을 뵈옵기를 원하지 아니 하리요”
또 묻기를 [즉심정토(卽心淨土]라 하는데
어찌하여 다시 정토에 왕생하기를 원하는가 하였더니 답하기를
[즉심정토라 함은 나무를 가리켜서 기둥이라 함과 같다.
즉 나무가 기둥이 될 수는 있거니와 나무 그대로가 기둥이 되지는 못하는 것과 같이
마음이 비록 정토를 지을 수는 있으나 마음 그대로가 정토는 아니다.
우리의 마음이 十二시(時)중에 일체 경계(境界)에 대하여
한털끝 만치라도 잡념(雜念) 염오심(染汚心)이 일어난다면,
이것은 곧 예상(穢相)이 공(空)하지 못한 것이거늘 어떻게 즉심정토라 하겠는가.
이와 같은 말은 모두 스스로 속는 것이다
만일 정토에 왕생하지 아니하면 유심정토가 끝끝내 드러나지 못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3). 대우선사(大佑禪師)의 설(設)
어떤 이가 묻기를 관경(觀經)에는
이 마음이 불을 짓고 이 마음이 곧 불이라 하였는데 어찌하여 다른 불을 염불하는가 하고 답하기를
마음이 본래 부처이므로 저 부처를 염불하게 하는 것이다
범망경(梵網經)에는
[나는 앞으로 될 부처요, 여러 부처는 이미 이룬 부처인줄 알라]하였으니,
너의 마음의 부처님 앞으로 될 부처이고 아미타불은 이미 이룬 부처이다.
앞으로 될 부처는 오랫동안 욕해(欲海)에 잠겨서
번뇌가 충분히 갖추어져 있어 출리(出離)할 때를 정하여 약속함이 까마득하나
이미 이룬 부처는 이미 보리(菩提)를 발하고 위신(威神)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어
중생을 도와서 보호하시므로 여러 부처님이 염불을 권하신 것이니,
즉 나의 앞으로 될 부처로써 다른 이미 이룬 부처를 구(求)하여 도와서 보호를 얻는 것이다 .
그러므로 중생이 만약 염불하지 아니하면
성인과 범부가 영원히 사이가 떨어지고 부자(父子)가 항상 괴리(乖離)하며
오래도록 윤회(輪廻)에 처(處)하여 서로 떨어진 거리가 먼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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