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육조단경

육조단경(9)

敎當 2010. 6. 25. 13:40

 

25. 佛行 - 부처님의 행

 

또 한 스님이 있었는데 법달(法達)이라 하였다.

항상 <법화경>을 외어 칠년이 되었으나 마음이 미혹하여

바른 법의 당처(正法之處)를 알지 못하더니, 와서 물었다.

"경에 대한 의심이 있습니다.

큰스님의 지혜가 넓고 크시오니 의심을 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법은 제법 통달하였으나 너의 마음은 통달하지 못하였구나.

경 자체는 의심이 없거늘 너의 마음이 스스로 의심하고 있다.

네 마음이 스스로 삿되면서 바른 법을 구하는구나.

나의 마음 바른 정(正定)이 곧 경전을 지니고 읽는 것이다.

나는 한평생 동안 문자를 모른다.

너는 <법화경>을 가지고 와서 나를 마주하여 한 편을 읽으라.

내가 들으면 곧 알 것이니라."

법달이 경을 가지고 와서 대사를 마주하여 한 편을 읽었다.

육조스님께서 듣고 곧 부처님의 뜻을 아셨고 이내 법달을 위하여 <법화경>을 설명하시었다.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법화경>에는 많은 말이 없다.

일곱 권이 모두 비유와 인연이니라.

 

부처님께서 널리 삼승(三乘)을 말씀하심은

다만 세상의 근기가 둔한 사람을 위함이다.

경 가운데서 분명히

'다른 승이 있지 아니하고 오로지 한 불승(佛乘)뿐이라'고 하셨느니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너는 일불승(一佛乘)을 듣고서 이불승(二佛乘)을 구하여 너의 자성을 미혹하게 하지 말라.

경 가운데서 어느 곳이 일불승인지를 너에게 말하리라.

경에 말씀하기를

'모든 부처님·세존께서는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나타나셨다'고 하셨다.

이 법을 어떻게 알며 이 법을 어떻게 닦을 것인가? 너는 나의 말을 들어라.

 

사람의 마음이 생각을 하지 않으면

본래의 근원이 비(空)고 고요(寂)하여 삿된 견해를 떠난다.

이것이 곧 일대사인연이리라.

 

안팎이 미혹하지 않으면 곧 양변(兩邊)을 떠난다.

밖으로 미혹하면 모양에 집착하고 안으로 미혹하면 공에 집착한다.

모양에서 모양을 떠나고 공에서 공을 떠난 것이 곧 미혹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법을 깨달아 한 생각에 마음이 열리면 세상에 나타나는 것이니라.

마음에 무엇을 여는가? 부처님의 지견을 여는 것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이니라.

네 문으로 나뉘나니,

깨달음의 지견을 여는 것(開)과 깨달음의 지견을 보이는 것(示)과

깨달음의 지견을 깨침(悟)과 깨달음의 지견에 들어가는 것(入)이니라.

 

열고 보이고 깨닫고 들어감(開示悟入)은

한 곳으로부터 들어가는 것이다.

곧 깨달음의 지견으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이

곧 세상에 나오는 것이니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나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스스로 언제나 마음자리로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열고 중생의 지견을 열지 않기를 항상 바라노라.

세상 사람의 마음이 삿되면 어리석고 미혹하여 악을 지어 스스로 중생의 지견을 열고,

세상 사람의 마음이 발라서 지혜를 일으켜 관조하면 스스로 부처님 지견을 여나니,

중생의 지견을 열지 말고 부처님의 지견을 열면 곧 세상에 나오는 것이니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이것이 <법화경>의 일승(一乘)법이다.

아래로 내려가면서 삼승(三乘)을 나눈 것은 미혹한 사람을 위한 까닭이니,

너는 오직 일불승만을 의지하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법달아, 마음으로 행하면(心行) <법화경>을 굴리고(轉法華),

마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법화경>에 굴리게 되나니,

마음이 바르면 <법화경>을 굴리고 마음이 삿되면 <법화경>에 굴리게 되느니라.

부처님의 지견을 열면 <법화경>을 굴리고

중생의 지견을 열면 <법화경>에 굴리게 되느니라."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힘써 법대로 수행하면 이것이 곧 경을 굴리는 것(轉經)이니라."

법달은 한 번 듣고 그 말끝에 크게 깨달아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울면서 스스로 말하였다.

"큰스님이시여, 실로 지금까지 <법화경>을 굴리지 못하였습니다.

칠년을 <법화경>에 굴리어 왔습니다.

지금부터는 <법화경>을 굴려서 생각 생각마다 부처님의 행을 수행하겠습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부처님 행이 곧 부처님이니라(卽佛行是佛)."

그 때 듣는 사람으로서 깨치지 않은 이가 없었다.

 

26. 參請 - 예배하고 법을 물음

 

그 무렵 지상(智常)이라고 하는 한 스님이

조계산에 와서 큰스님께 예배하고 사승법(四乘法)의 뜻을 물었다.

지상이 큰스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은 삼승(三乘)을 말씀하시고 또 최상승(最上乘)을 말씀하시었습니다.

제자는 알지 못하겠사오니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혜능대사가 말씀하셨다.

"너는 자신의 마음으로 보고 바깥 법의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원래 사승법이란 없느니라.

사람의 마음이 스스로 네 가지로 나누어 법에 사승(四乘)이 있을 뿐이다.

 

보고 듣고 읽고 욈은 소승(小乘)이요,

법을 깨쳐 뜻을 앎은 중승(中乘)이며,

법을 의지하여 수행함은 대승(大乘)이요

일만 가지 법을 다 통달하고 일만 가지 행을 갖추어

일체를 떠남이 없으되 오직 법의 모양을 떠나고 짓되,

얻은 바가 없는 것이 최상승(最上乘)이니라.

 

승(乘)은 행한다는 뜻이요 입으로 다투는 것에 있지 않다.

너는 모름지기 스스로 닦고 나에게 묻지 말라."

 

또 한 스님이 있었는데 이름을 신회(神會)라고 하였으며 남양 사람이다.

조계산에 와서 예배하고 물었다.

"큰스님은 좌선하시면서 보십니까? 보지 않으십니까?"

대사께서 일어나서 신회를 세 차례 때리시고 다시 신회에게 물었다.

"내가 너를 때렸다. 아프냐, 아프지 않으냐?"

신회가 대답하였다.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합니다."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느니라."

신회가 또 여쭈었다.

"큰스님은 어째서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십니까?"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본다고 하는 것은 항상 나의 허물을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다고 말한다.

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하늘과 땅과 사람의 허물과 죄를 보지 않는 것이다.

 

그 까닭에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느니라.

네가 아프기도 하고 아프지 않기도 하다 했는데 어떤 것이냐?"

신회가 대답했다.

"만약 아프지 않다고 하면 곧 무정(無情)인 나무와 돌과 같고,

아프다 하면 곧 범부와 같아서 이내 원한을 일으킬 것입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신회야, 앞에서 본다고 한 것과 보지 앉는다고 한 것은 양변(兩邊)이요,

아프고 아프지 않음은 생멸(生滅)이니라.

너는 자성을 보지도 못하면서 감히 와서 사람을 희롱하려 드는가?"

신회가 예배하고 다시 더 말하지 않으니,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네 마음이 미혹하여 보지 못하면 선지식에게 물어서 길을 찾아라.

마음을 깨쳐서 스스로 보게 되면 법을 의지하여 수행하라(依法修行).

네가 스스로 미혹하여 자기 마음을 보지 못하면서 도리어 와서 혜능의 보고 보지 않음을 묻느냐?

내가 보는 것은 내 스스로 아는 것이라 너의 미혹함을 대신할 수 없느니라.

만약 네가 스스로 본다면 나의 미혹함을 대신하겠느냐?

어찌 스스로 닦지 아니하고 나의 보고 보지 않음을 묻느냐?"

신회가 절하고 바로 문인이 되어 조계 산중을 떠나지 않고 항상 좌우에 머물렀다

  

27. 對法 - 상대되는 법

 

대사께서 드디어 문인

법해(法海), 지성(志誠), 법달(法達), 지상(智常), 지통(志通), 지철(志徹),

지도(志道), 법진(法珍), 법여(法如), 신회(神會) 등을 불렀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들 열 명의 제자들은 앞으로 가까이 오너라.

너희들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니,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 너희들은 각각 한 곳의 어른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들에게 법 설하는 것을 가르쳐서 근본 종취를 잃지 않게 하리라.

삼과(三科)의 법문을 들고 동용삼십육대(動用三十六對)를 들어서

나오고 들어감에 곧 양변을 여의도록 하여라.

 

모든 법을 설하되 성품과 모양(性相)을 떠나지 말라.

만약 사람들이 법을 묻거든

말을 다 쌍으로 해서 모두 대법(對法)을 취하여라.

가고 오는 것이 서로 인연하여 구경에는 두 가지 법을 다 없애고

다시 가는 곳마저 없게 하라.

 

삼과법문(三科法門)이란 음(蔭). 계(界). 입(入)이다.

음(蔭)은 오음(五陰)이요,

계(界)는 십팔계(十八界)요,

입(入)은 십이입(十二入)이니라.

어떤 것을 오음(五陰)이라고 하는가?

색음(色陰)·수음(受蔭)·상음(相蔭)·행음(行蔭)·식음(識蔭)이니라.

어떤 것을 십팔계(十八界)라고 하는가?

육진(六塵)·육문(六門)·육식(六識)이니라.

어떤 것을 십이입(十二入)이라고 하는가?

바깥의 육진(六塵)과 안의 육문(六門)이니라.

어떤 것을 육진(六塵)이라고 하는가?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이니라.

어떤 것을 육문(六門)이라고 하는가?

눈(眼)·귀(耳)·코(鼻)·혀(舌)·몸(身)·뜻(意)이니라.

법의 성품(法性)이

육식인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육식과

육문과 육진을 일으키고

자성은 만법을 포함하나니 함장식(含藏識)이라고 이름하느니라.

생각을 하면 곧 식이 작용하여 육식이 생겨 육문으로 나와 육진을 본다.

이것이 삼육은 십팔이니라(3*6=18).

 

자성이 삿되기 때문에 열 여덟 가지 삿됨이 일어나고,

자성이 바름(正)을 포함하면 열 여덟 가지 바름이 일어나느니라.

악의 작용을 지니면 곧 중생이요, 선이 작용하면 곧 부처이니라.

 

작용은 무엇들로 말미암는가?

자성의 대법으로 말미암느니라.

바깥 경계인 무정(無情)에 다섯 대법(對法)이 있으니,

하늘과 땅이 상대(相對)요,

해와 달이 상대이며,

어둠과 밝음이 상대이며,

음과 양이 상대이며,

물과 불이 상대이니라.

 

논란하는 말과 직언 하는 말의 대법과 형상의 대법에 열 두 가지가 있다.

유위(有爲)와 무위(無爲),

유색(有色)과 무색(無色)이 상대이며,

유상(有相)과 무상(無相)이 상대이며,

유루(有漏)와 무루(無漏)가 상대이며,

현상(色)과 공(空)이 상대이며,

움직임(動)과 고요함(靜)이 상대이며,

맑음(淸)과 흐림(濁)이 상대이며,

범(凡)과 성(聖)이 상대이며,

승(僧)과 속(俗)이 상대이며,

늙음(老)과 젊음(少)이 상대이며,

큼(大)과 작음(少)이 상대이며,

김(長)과 짧음(短)이 상대이며,

높음(高)과 낮음(下)이 상대이니라.

 

자성이 일으켜 작용하는 대법에 열 아홉 가지가 있다.

삿됨과(邪) 바름(正)이 상대요,

어리석음(癡)과 지혜(惠)가 상대이며,

미련함(愚)과 슬기로움(智)이 상대요,

어지러움(亂)과 선정(定)이 상대이며,

계(戒)와 잘못됨(非)이 상대이며,

곧음(直)과 굽음(曲)이 상대이며,

실(實)과 허(虛)가 상대이며,

험함(險)과 평탄함(平)이 상대이며,

번뇌(煩惱)와 보리(菩提)가 상대이며,

사랑(慈)과 해침(害)이 상대이며,

기쁨(喜)과 성냄(嗔)이 상대이며,

버림(捨)과 아낌( )이 상대이며,

나아감(進)과 물러남(退)이 상대이며,

남(生)과 없어짐(滅)이 상대이며,

항상함(常)과 덧없음(無常)이 상대이며,

법신(法身)과 색신(色身)이 상대이며,

화신(化身)과 보신(報身)이 상대이며,

본체(體)와 작용(用)이 상대이며,

성품(性)과 모양(相)이 상대이니라.

 

유정·무정의 대법인 어(語)·언(言)과 법(法)·상(相)에 열두 가지 대법이 있고

바깥 경계인 무정(無情)에 다섯 가지 대법이 있으며,

자성이 일으켜 작용하는데 열아홉 가지의 대법이 있어서

모두 서른여섯 가지 대법을 이루니라.

이 삼십육 대법을 알아서 쓰면

일체의 경전에 통하고 출입에 곧 양변을 떠난다.

어떻게 자성이 기용하는가?

삼십육 대법이 사람의 언어와 더불어 함께 하나

밖으로 나와서는 모양에서 모양을 떠나고(相離相),

안으로 들어와서는 공에서 공을 떠나나니(空離空)

공(空)에 집착하면 오직 무명만 기르고,

모양(相)에 집착하면 오직 사견만 기르느니라.

 

법을 비방하면서 곧 말하기를 '문자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문자를 쓰지 않는다고 말 할진 대는

사람이 말하지도 않아야만 옳은 것이다.

언어가 곧 문자이기 때문이다.

 

자성에 대해서 공을 말하나

바른 말로 말하면 본래의 성품은 공하지 않으니

미혹하여 스스로 현혹됨은 말들이 삿된 까닭이니라.

어둠이 스스로 어둡지 아니하나 밝음 때문에 어두운 것이다.

어둠이 스스로 어둡지 아니하나 밝음으로써 변화하여 어둡고,

어둠으로써 밝음이 나타나나니 오고 감이 서로 인연한 것이다.

삼십육 대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대사께서 열 명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후에 법을 전하되 서로가 이 한 권의 <단경>을 가르쳐 주어

본래의 종취를 잃어버리지 않게 하라.

<단경>을 이어받지 않는다면 나의 종지가 아니니라.

이제 얻었으니 대대로 유포하여 행하게 하라.

<단경>을 만나 얻은 이는 내가 친히 주는 것을 만남과 같으니라."

열 명의 스님들이 가르침을 받아 마치고 <단경>을 베껴

대대로 널리 퍼지게 하니 얻은 이는 반드시 자성을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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