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의 고승. 혜근(彗勤)이라고도 쓴다.
성은 아(牙)씨. 속명은 원혜(元惠). 호는 나옹(懶翁) 또는 강월헌(江月軒).
선관서영(善官署令) 서구(瑞具)의 아들이다.
21세 때 친구의 죽음으로 인하여 무상을 느끼고,
공덕산 묘적암(妙寂庵)에 있는 요연선사(了然禪]師)를 찾아가 출가하였다.
그뒤 전국의 이름있는 사찰을 편력하면서 정진하다가
1344년(충혜왕 5) 양주 천보산 회암사(檜巖寺)에서 대오(大悟)하였다.
그때 이 절에 우거하고 있던 일본 승 석옹(石翁)에게 깨달음을 인가받았다.
1347년(충목왕 3) 원나라로 건너가서 연경(燕京) 법원사(法源寺)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인도승 지공(指空)의 지도를 받으며 4년 동안 지내다가
1358년(공민왕 7)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오대산 상두암(象頭庵)에 은신하였으나
공민왕과 태후의 간곡한 청에 의하여 잠시 신광사(神光寺)에 머무르면서
설법과 참선으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그뒤 공부선(功夫選)의 시관(試官)이 되었고,
1361년부터 용문산·원적산·금강산 등지를 순력한 뒤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다
1371년 왕으로부터 금란가사와 내외법복(內外法服)·바리를 하사받고
왕사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근수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 보제존자
(王師 大曹溪宗師 禪敎都摠攝 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 普濟尊者)에 봉해졌다.
그는 정도(正道)가 혼침된 고려말의 불교계에
습정균혜(習定均 慧)와 근수(勤修)·지혜로써 성불의 가능성을 보여준 고승으로서,
철저한 불이사상(不二思想)의 토대 위에서 선(禪)을 이해시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고려말의 선풍은 그에 의하여 새롭게 선양되었다.
지공의 선풍이 공해탈선(空解脫禪)의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통적인 간화선(看話禪)의 입장을 취하였고,
종래의 구산선문(九山禪門)이나 조계종과는 다른 임제(臨濟)의 선풍을 도입하여
침체된 불교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그의 <귀의자심삼보(歸依自心三寶)>의 주장과
"염불은 곧 참선"이라고 한 것은 이후의 우리나라 선종에서 계속 전승되었다.
계율관(戒律觀)에서도 삼귀의(三歸依)가 아닌 사귀의를 주장하고 있어 주목된다.
계목(戒目)으로는
(1)수정신사귀의(受淨信四歸依),
(2)참제제삼업죄(懺除諸三業罪),
(3)발홍서육대원(發弘誓六大願),
(4)최상승무생계(最上乘無生戒)로 나누어져 있다.
이는 일반적인 불교의 5계(戒)나 보살계(菩薩戒)와는 다른 독특한 것이다.
또, 적극적인 사회참여와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보살도를 강조하기 위하여
육대서원(六大誓願)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는 고려말 보우(普愚)와 함께 조선시대 불교의 초석을 세운 위대한 고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왕명으로 밀성(密城 : 密陽) 영원사(瑩源寺)로 옮기던 중
5월 15일 나이 56세, 법랍 37세로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사랑도 부질없어 마움도 부질없어
청산은 나를보고 말없이 살라하네~
나옹선사의 글이 노래로 만들어져 즐겨 부르던 노래의 가사입니다.
이 노래를 들었을때 노랫말이 너무 좋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 후 불교에 입문해서 이 노랫말이 나옹선사의 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옹선사는 와선(臥禪)을 하셨던 분으로 항상 누워있는 모습을 보고
나옹(懶翁-게으를나, 어르신옹)게으른 어르신이란 뜻의 나옹이라 놀려
이 후 나옹화상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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