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수월스님

돌 관음의 영험

敎當 2017. 2. 16. 10:43

수월은 화엄사를 찾아오는 신도들에게

관세음보살을 부르라고 가르쳤다.

늘 관세음 보살을 그리워하고 생각생각마다

관세음보살을 놓치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대비심다라니로 관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곧은 길을 삼으라고 가르쳤다.

 

화엄사에는 아주 영험 있는 관세음보살 두분이 계셨다.

한 분은 법당 안에 모신 석 자 남짓한 돌 관세음보살이었고

다른 한 분은 법당 밖 산자락에 서 있는 돌 관세음보살이었다.

먼저 법당 밖에 있는 돌 관세음보살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보자.

 

화엄사 법당 터 바로 뒤쪽으로 삼십 미터쯤 올라가면

송림산 산자락이 끝나는 곳에 높이가 삼 미터 남짓한 돌이

푸른 소나무를 뒤로하고 서 있는데

조금 떨어진 아랫쪽에서 올려다보면

영락없이 파도를 타고 서 있는 수월관음의 모습처럼 보인다.

사람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채,

긴긴 세월의 비바람 속에서 가까스로 모습을 드러낸 돌 관세음보살이다.

수월이 머물고 있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이 관세음보살 앞에서 기도하여

큰 영험을 얻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화엄사에 오는 이들은 이 돌 관세음보살상 둘레를

늘 깨끗이 청소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봄날,

마을에 사는 아이들이 떼 지어 화엄사 가까이로 꽃을 꺽으러 왔다.

이것은 봄이면 꽃 대궐을 이루는 화엄사에서 늘 볼수 있는 풍경 이었다.

수월은 아이들을 무척 좋아했다.

그래서 동네 아이들은 꽃을 꺽어들고 화엄사 마당에 모여

한바탕 놀고 가기가 일쑤였다.

 

수월이 함경도 회령 땅에서 탁발을 하고 다닐 때였다.

동네 아이들이 수월을 쫏아다니며 `원숭이 중. 원숭이 중` 하고 놀렸다.

수월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탁발만 하고 다녔고

수월의 이런 모습에 더욱 재미를 느낀 동네 아이들은 더욱 크게 놀려대며

수월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동네 어른들이 보다 못해 수월더러 아이들을 혼내주라고 하자

수월은 웃으며 이렇게 말할 뿐이였다.

 

"이 동네 아이들은 다 저렇네비여. 원숭이를 처음 봤네비여."

이처럼 수월은 아이들보다도 더 아이들 같았다.

 

그날 화엄사 마당에서 뛰어놀던 아이들 가운데

개구쟁이 하나가 돌 관세음보살상을 타고

올라가 무동을 타고 놀았다.

그날 밤이었다.

 

그 개구쟁이의 부모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화엄사로 달려와 부리나케 수월을 찾았다.

아들의 엉덩이가 모두 곪아터져 몸을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이엇다.

수월은 바로 마을로 내려가 그 아이의 곪아터진 엉덩이를

두어 번 어루만져주고 머리도 쓰다듬어 주었다.

하룻밤이 지나자 아이의 상처는 말끔히 아물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은 법당 안 돌 관세음보살상에게서도 있었다.

화엄사 법당 안에는 한쪽 귀가 없는 돌 관세음보살을 모셔놓았다.

이 돌 관세음보살은 수월이 어디선가 등에 모시고 온 관음상인데

이 관세음보살의 영험 또한 대단했다고 한다.

 

어느 날이었다.

아들을 낳으려고 기도를 올리러 다니던 한 아낙이

한쪽 귀가 없는 이 관세음보살을 보고 웃음을 터트리며 흉을 보았다.

그 뒤 이 아낙은 한쪽 귀가 없는 짝귀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수월은 이 아이의 한쪽 귀 또한 다시 돋아나게 해주어야 했다.

 

법당 안에 모셨던 그 돌 관세음보살은

일제가 화엄사를 군사기지로 만들 때

도문 가까이에 있는 용성 마을 어느 절로 옮긴 뒤 자취가 없어졌다.

그러다가 1994년 봄부터 뒤늦게나마 이 관세음보살상을 찾는 일을 벌인 끝에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묻혀 있는 곳을 찾아냈다.

그렇지만 그것을 다시 땅 위로 모시는 일은 여간 큰 일이 아니어서

그 관세음보살상을 언제 다시 보게 될 지 기약하기 어렵다.

 

또 법당 밖의 돌 관세음보살상은

한사냥꾼이 총질을 해서 가슴과 얼굴 모습이

많이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그 일 때문인지 그 사냥꾼은 슬픈 일생을 마치게 되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