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봄,
몽골과 북만주 사이에 있는 토성 마을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은 사흘에 걸친 회의 끝에 다섯명씩 조를 짜서 동포 마을을 돌면서
독립전쟁에 참여할 것을 권장하는 연설을 하기로 했다.
이 가운데 한 청년이 나자구 화엄사에서 오리 남짓 떨어진 마을에서 연설을 하고 다니다가
그만 몸을 크게 다쳐 동포 집 뒷방에 누워 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청년은 화엄사에서 온 한 스님을 만나
그 스님께 업혀 화엄사로 갔다.
이 청년은 경남 하동 사람으로 이미 불교에 관심이 많아
수월에 대한 이야기를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는 일본 교토와 중국 상해에서 공부하다가 독립운동에 몸을 던진 것이다.
이 청년이 그렇게 우연히 화엄사에 들른 것은
그의 나이 스믈다섯살 때였다.
해질 무렵 화엄사에 도착했는데 밖에 있던 수월이 반겨 맞아주었다고 한다.
조선에 있을 때부터 수월의 법력을 흠모하던 청년은 무척 감동했다.
청년은 화엄사에 머물면서 수월에게 이레 동안 치료를 받은 끝에 말끔히 건강을 되찾았다.
그때 청년은 수월에게서 금쪽같은 법문을 들었으며
수월이 수분하에서 지낸 이야기도 수월의 입으로 바로 듣게 되었다.
몇 달 뒤 이 청년은 몽골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고
해방이 되던 해에 고국 땅에 돌아와
충청도의 한 작고 조용한 절에서 수행자들을 가르치다가
지난 2000년 입적했다.
수월스님 말씀도 이 분이 해준 증언을 뽑아 정리한 것이다
사람이 일흔해 전에 들은 이야기를 정확히 기억할 수 있을까.
그러나 한 피끓는 청년의 삶을 뒤바꿔놓은 수월의 한 마디 한 마디였으니
기억하기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리라.
뿐만 아니라 수월이 들려준 그 법문은 두고두고
이 스님의 수행생활을 살아 있게 만드는 깨침의 말인 경어가 되었음에야.
이 스님이 증언한 수월의 수분하에서의 생활은 이렇다.
수월스님과 헤어지던 날이었다.
"열심히 수행혀라.
이 공부하는데는 다 쓸데없다.
오직 이 마음 하나 비우면 그만인겨,
세상에서 마음 비우는 일보담 더 어려운 게 없어.
또 참는 일보담 더 어려운게 없어 ...
스님들과 동포들이 내게 이런 말을 가끔 햐
스님은 그 고약하고 독한 나쁜 놈 밑에서
워째서 고렇게 여섯 해 동안이나 갖은 욕을 얻어 먹음시러 살었냐"고
내가 수분하에서 지낸 애기를 워디서 들은 모양이여
동네 사방에서 고렇게 애기를 들었네비여.
그때 나는 내 도를 다 이루기 위해
여섯 해 동안 어떤 젊은 스님 믿에 있었던 겨.
그 젊은 스님이 내게 무신 행패를 부리고
무신 욕지거리를 퍼부어도 나는 한 순간도 성내는 마음이 일지 않았어.
나는 그런 내 보림생활이 참으로 기쁘고 즐거웠던 겨.
그러니 그 젊은 스님은 내게 더없이 소중한 스승이었단 말여.
나는 그사람 때문에 내 보림을 이룬 셈이여.
자네는 뒷날 꼭 중이 되고 말겨,
중이 되더라도 딴 생각하지 말고 아는 척 하지말고
어리석게 열심히 공부만 혀라. 공부는 보림이 중요한 뱁이여."
'경전 > 수월스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송림산에서 (0) | 2017.02.13 |
---|---|
조선 사람들이 일군 절 송림산 화엄사 (0) | 2017.02.10 |
해물지심(害物之心) (0) | 2017.02.06 |
만주 개 (0) | 2017.02.02 |
내딛는 발걸음 속 자비의 바람 (0) | 2017.0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