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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스님-마음인가 물질인가

敎當 2015. 7. 30. 11:35

불교는 마음 일원주의입니다.

인류역사를 통하여 가장 치열한 이데올로기 싸움이 무엇이었습니까?

유물론과 유심론의 싸움이었습니다.

유물론은 모두가 물질뿐이다라고 말하고, 유심론은 모두가 마음뿐이다라고 말합니다.

 

여러 가지 형태의 이데올로기가 많이 있으나,

따지고 보면 결국은 마음인가 물질인가 하는 싸움인 것입니다.

일반 중생들은 자기 마음의 깊이를 짐작하지 못하니까

눈에 보이는 대로 ! 이놈의 몸뚱이는 다 물질이 아닌가합니다.

 

마르크스의 유물변증법은 유물론의 기조위에서 세워졌습니다.

따라서 공산주의도, “모두가 다 물질뿐이다.

마음은 결국 우리 육체에 있는 뇌의 반사에 불과하다이렇게 말합니다.

따라서 불교나 기독교에서 본다면 그런 입장을 진리로 볼 수 없습니다.

 

물질은 허망한 것이지만,

가급적이면 마땅히 평등하게 경제적으로 공정한 분배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에 앞서 인간성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부터 풀어나가야 합니다.

인간성문제만 바로 풀어버리면 다른 문제는 저절로 풀립니다.

그런 것이 부처님 법문에서

약명료심(若明了心)하면 만행구비(萬行具備)”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만약 마음을 깨달아 버리면 만 가지 행이 거기에 따라간다는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근본적인 치유약을 아가타약(阿伽陀藥, 不死藥)이라 합니다.

즉 만병통치약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아가타약은 반야의 약 혹은 반야의 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야의 사상을 가지지 않고 서는 절대로 고황에 들어 있는,

백 약이 무효한 그런 병은 고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반야의 약을 아십니까?

반야는 모든 법이 공하다는 도리입니다.

제법이 공하다는 것은,

이것은 나요 혹은 저것은 너요 하는 모든 것이 다 비어 있다는 도리입니다.

미운 마음도 비어있고 미워하는 몸도 비어 있으며 미운 대상도 비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초기설법은 모두가 다 무상(無常)이요.

무상(無常)이며 무아요. 공이라 하는 것입니다.

바로 보면 다 무상인 것이고, 무상이어서, ‘라 할 것 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잘못 봐서 라고 고집을 한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이런 도리를

두고두고 그때그때 천만 번 되풀이해서 새겨봐야 합니다.

따라서 반야심경

그냥 얼른 가져다가 소리 좋게 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뜻을 음미하면서 봐야 됩니다.

그렇게 음미하고 생각하다 보면 자기 암시가 되어서,

실제로 본래 비어 있는 것이므로 결국은 !”하고 텅 비어 온단 말입니다.

 

이것을 불교 용어로 표현하면 신심탈락(信心脫落)이라고 합니다.

몸과 마음의 탈락이라는,

즉 다 떠넘겨 버려질 때는 몸과 마음이 그렇게 텅텅 비어 버린다는 말입니다.

불교는 그냥 이론적으로 알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실제로 체험하는, 즉 실체화시켜야 하는 진리입니다.

그래야 본체를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본래 빈 것인데, 우리 중생의 번뇌 낀 마음으로 보기 때문에 모두가 다 물질뿐이란 말입니다.

천지 우주가 다 물질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다 비었다.’고 말하면 납득이 안가는 게 당연하지요.

 

그러나 훤히 다 알고 있는 부처님 말씀이므로 우리는 우선 믿어야 하겠지요.

믿은 다음에는 우리 스스로도 체험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체험해야 하는가?

우리 마음을 오로지 한 마음으로 통일시킨단 말입니다.

좋다 궂다 밉다 예쁘다, 혹은 이래저래 그것이고 이것이고 하는

그럼 산란한 마음 때문에 우리 마음이 흩어져서, 혼탁해져서 바닥이 안보이게 됩니다.

 

부처님 공부는 모두가 다 바닥을 보기 위해서,

우리 마음의 본성품인 진여불성 자리를 보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가만히 두면 본래 부처인지라 앙금이 가라앉을 텐데,

자꾸만 시비 분별하므로 흩어진 마음이 안정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험공부 하는 사람도 공부를 몇 시간 하면 머리가 띵 하고 그럴 것입니다만,

그런 머리도 가라앉히려면, 내 몸뚱이도 여러 종류의 원소들이 결합되어서 빙빙 돌고 있는

세포들의 유기적인 집합체에 불과한 것이라 생각해야 합니다.

 

내 몸뚱이를 구성하는 원소도 모두가 다 본래는 물질이 아닌 순수한 진여불성의 파동입니다.

그 파동이 원자가 되고, 원소가 되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존재든 모두가 다 진영불성의 한 파동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마음의 파동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천지우주가 텅텅 비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무명심으로 생겨난 번뇌가 상()을 만들고,

그 상으로 말미암아 달이 되고 해가 되고, 은하계가 되고 태양계가 되고 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렇게 상을 낸다 하더라도,

그것은 있는 그대로 고유한 실체를 지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달도, 별도, 태양도 모두가 한순간도 한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매순간 변화해 마지않는 것입니다.

 

내 몸도 역시 매 순간마다 변동해 마지않습니다.

일반 중생들은 그걸 보지 못하므로, 내가 고유하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무상(無常) 아닙니까?

무상은 항상(恒常)이 아니다, 항상한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일체만법 모두가 다 무상입니다.

 

무상한 것은 어려운 말로 하면,

한 순간도 공간성을 지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매 순간 변화하는데 어떻게 고유한 공간성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그것이 공()이란 말입니다.

여러분은 무상을 잘 느껴야 됩니다.

 

반야심경의 제법공 도리는 그렇게 심심미묘(甚深微妙)한 도리입니다.

그저 물질은 물리학적으로 분석하면 에너지가 되겠지하는,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가령 수분은 영도에서 냉각되어 얼음이 되겠지요.

즉 고체가 된다는 말입니다.

100도 이상으로 가열하면 비등해서 수증기가 되겠지요.

그리고 그것이 공중에 올라가서 식혀지면 구름이 되지요.

그러므로 수분이 얼음이 되든 물이 되든 간에 수분이라는 것은 조금도 변질이 없지 않습니까?

그와 똑같이 진여불성이

달을 구성하건 태양을 구성하건 우리 몸을 구성하건 간에 그 자체는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물질이 아닌 진여불성,

우리가 그것을 마음이라 한다 해도 이름을 그렇게 붙인 것일 뿐,

본래 이름을 가지고 있었겠습니까?

다만 공간성과 시간성 없으니까 우리가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