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도인과 선사

금오선사

敎當 2014. 2. 8. 19:58

충북 보은 속리산의 품이 넓은 때문일까.

법주사의 33미터 청동대불조차 위압적이지 않다.

법주사는 금오선사(1896~1968)가 열반한 곳이자 ‘금오문중’의 본산이다.

 

전남 강진에서 태어난 금오는 전생으로부터 인연때문인지

불과 16살에 도를 구하겠다며 금강산으로 떠났다.

걸어서 석달 열흘만에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마하연.

제자되기를 청하는 금오에게 도암 선사는 “한 달 안에 땔나무 백단을 한다면 제자를 삼겠다”고 했다.

고향에서 서당에 다니다 온 소년 금오는 죽을 힘을 다해 나무를 했지만

한달이 다 돼도 예순아홉단밖에 나무를 하지 못했다.

그는 기왕 쫓겨날 때 쫓겨나더라도 일흔단을 채워놓겠다며

한 밤에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하다가 발을 헛디뎌 새벽녘에야 구조됐다.

 

몸을 추스린 뒤 하직인사를 온 금오에게 도암은 오히려 “어디를 가겠다는 것이냐”고 호통을 쳤다.

꾀많은 여우보다 미련한 곰이 되겠다는 어린 금오의 정성을 선사의 혜안이 어찌 놓칠 것인가.

‘미련한 곰’ 같은 수행은 이렇게 시작됐다.

스승으로부터 ‘이 뭣고’ 화두를 받아 산하를 떠돌며 수행정진하기 10여년.

철벽처럼 그를 가로막던 화두도 타협을 모르는 그의 미련함에 결국 두 손을 들었다.

그의 나이 28살 때였다.

 

개안을 체험한 금오는 충남 예산 보덕사로 향했다.

만공의 수제자 보월 선사가 불과 30대에 조실로서 천하의 납자를 맞이하고 있었다.

보월은 단박에 그가 허상의 굴레에서 벗어났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보월은 불과 40살에 홀연히 몸을 벗어버렸다.

금오가 다시 유랑길에 오르자 만공이 그를 불렀다.

만공은 애제자 보월을 대신해 금오에게 전법게를 내려

그가 보월의 법제자(깨달음을 이은 제자)임을 인가했다.

 

법주사에서 문장대를 향해 다시 10리길.

세속의 마음을 벗으라는 듯 세심정(洗心亭)이란 휴게소가 기다리고 있다.

물소리 바람소리를 들으며 먹는 열무국수 한 그릇이 별미다.

금오와 그 제자들은 국수를 좋아했다.

태백산 동암에서 정진할 때 금오와 그 제자들은

산 300평을 개간해 밀을 심어 직접 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그 때 금오를 시봉했던 월남 스님은 국수도인이었다.

 

월남은 60년대 금오가 말년에 문을 연 법주사 총지선원의 초대 선원장을 했는데,

스승의 불같은 성정을 닮았다.

월남이 화가 나면 아무도 말릴 수 없어 상대는 초주검이 될 지경이었는데,

그때 월남을 제지할 방법은 단 한가지뿐이었다.

누군가가 월남에게 달려가 “스님, 지금 국수를 삶으려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하고 물으면,

월남은 바로 몇 초 전의 일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선

“국수! 국수는 내가 삶아야지”라면서 국수를 삶으려 부엌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세심정을 지나 ‘이뭣고 다리’를 건너니 복천암이다.

30년 간 이곳에서 정진해 수좌(선승)계에서 신망을 얻고 있는 월성 스님이 맞는다.

세속인들과 거의 만나지 않은 산사람이기에,

산골 처녀와 같은 수줍음이 흐른다.

그러나 그 수줍음이 어찌 금오로부터 물려받은 듯한 칼 같은 기개를 감출 수 있을까.

월성 스님은 50년 전인 1955년 출가해 지리산 화엄사와 거창 연수사 등에서 스승을 시봉했다.

스승 금오는 견성 뒤에도 탁마를 쉬지 않았다.

서울에서 걸인들 틈에서 사는 만행을 하는가하면

전주에선 밭가에 움막을 지어놓은 채 탁발을 하며 살았다.

또 경허의 맏제자인 수월선사를 만주까지 찾아가 1년 간 모시며 정진했다.

 

금오는 달마대사를 닮았다.

힘이 장사인데다 목소리가 우렁차 ‘호랑이보다 무서운 사람’으로 불렸다.

금오는 지리산 칠불암에서 7~8명의 대중이 모이자

‘정진하다 죽어도 좋다’는 서약을 각자가 쓰게 한 뒤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용맹정진이란 일체 자지 않은 채 하는 수행이다.

금오는 조는 납자들을 물푸레나무로 후려쳤다.

납자들 모두 구렁이가 몸을 감은 듯 온몸에 멍이 들었다.

금오가 있는 곳은 늘 그처럼 처절한 수행이 뒤따랐다.

결제(겨울과 여름에 90일씩 하는 집중 수행)기간이든 아니든 어디나 선방이 되었다.

지금 주요 선방에서 7일 또는 21일 동안 용맹정진을 하는 풍토도 금오가 불을 지른 것이었다.

 

동진(여성과 관계하기 전) 출가해

세속의 정이나 계산속을 모르던 금오의 언행은 순진무구하기 그지 없었다.

오직 화두만을 일심으로 참구하라던 스승 앞에서

정신이 흐트러지거나 분별망상을 내세우면 번갯불처럼 귀싸대기를 올려붙였다.

그러면 제자들은 그런 스승이 원망스러워 밤봇짐을 싸 다른 절에서 결제에 참여했다.

그러나 며칠이 못 가 그 스승이 너무도 그리워져 결제가 끝나기 무섭게 스승에게 돌아가곤 했다.

그 스승에 그 제자인가.

 

월성 스님은

“이 공부는 자존심과 인사치레를 내세워선 십만팔천리 멀어진다”며

“이번 생은 안 낳은 셈 치고 정진해야 한다”고 했다.

여기는 보은이다.

제자들은 무엇으로 스승에 보은하는가.

속리(俗離·세속의 잡념을 벗어나고)산에서 ‘이뭣고 다리’를 다시 건너니,

법주(法住·깨달음의 진리에 거함)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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