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수월스님

지리산 천은사 이야기

敎當 2017. 1. 4. 15:42

수월은 나이 마흔둘이 되던 1896년에

지리산 감로동천에 있는 천은사와 상선암, 그리고 우번대에서 지냈다.

지리산도 금강산처럼 문수보살이 늘 계신다는 불교의 성지로

강원도 오대산과 함께 우리나라 문수 신앙의 중심지다.

 

문수신앙이 화엄사상에서 유래한 까닭에

이 땅의 화엄 불교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수월은 이런 성스러운 산에서 봄, 여름 그리고 가을 한철을 지냈다.

그해 이른 봄에 땔나뭇꾼 모습을 하고 천은사로 들어갔으나 수월을 알아보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여기서도 수월은 종일 산에 들어가 땔나무를 해 나를 뿐이었다.

그때 수월은 현재 천은사 선원으로 쓰고 있는 보광전에 머물고 있었다.

 

어느 날 밤이었다.

대중이 다 잠든 깊은 밤

경비를 돌던 스님이 난데 없이 종을 크게 울리며 "불이야!" 하고 외쳤다.

밤새 삼매에 든 수월의 몸에서 다시 빛줄기가 터져나온 것이다.

그때 수월이 나툰 빛줄기가 어찌나 크고 강렬했던지

천은사에 살고 있던 대중들뿐만 아니라 아랫마을 사람들 까지도 함께 몰려와

이 불가사의한 광경 앞에 넋을 잃고 말았다고 한다.

이 일로 수월은 그의 본디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고

천은사 대중들은 수월을 무조건 상선암 조실로 모셨다.

그때 상선암은 천은사에 딸린 선원이었는데

천은사에서 노고단으로 오르는 길을 따라 한 시간 남짓 올라간 곳에 있다.

 

이 절은 나옹스님이 세운 절로

멀리는 이름난 남도의 산봉우리들이 점점이 솟아 있고

산자락에는 유유히 흘러가는 섬진강의 흰 물빛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지금 있는 건물은 6 25 전쟁이 끝난 뒤에 세운 것으로 수월이 머물던 때의 모습은 아니다.

수월은 여기서도 조실 노릇을 하며 지냈는데 그의 일상이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낮에는 나무하고 밤에는 줄곧 않아 있는 그런 생활이었다.

이때 함께 지낸 대중 가운데는 3,1 운동의 으뜸 구실을 한 서른세 분의 지도자 가운데 한 분인 용성스님이 있었는데

당시 용성 스님은 조실 스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대중의 기강을 다스리는 소임이니 입승을 맡고 있었다고 한다.

 

대중이 서른 명쯤 모여 살았다고 하니 절의 규모가 지금보다는 훨씬 컸던 모양이다.

이 절은 워낙 높은 산중에 있기 때문에 천은사에 사는 사미승들이

이레에 한 번씩 식량과 부식을 등에 지고 올라가 스님들께 공양을 올렸다고 한다

이 시절에 천은사에서 사미 생활을 했고

화엄사 주지를 지낸 적이 있는 용하스님은 뒷날 수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수월스님은 상선암 조실로 기셨는디 인사를 드려도 한 마디 말씀이 없으셧구먼

그때 내 나이 열여섯이었제.

내겐 영 도인같아 보이들 않고 무슨 땔나무꾼 머슴 인생만 같더라고."

용하는 만해와 함께 일제 불교에 맞서 싸운 스님이다.

뛰어난 강백으로 화엄사 주지를 지낸 진응스님의 강맥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