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수월스님

경허의 세 달

敎當 2016. 12. 23. 10:33

수월은 천장암에서도 나무꾼 노릇을 했다.

이것은 당시 스님이 되려면 누구나 거쳐야 하는 절집의 풍습이었다.

흔히 이것을 행자수업 기간이라고 한다.

이 기간 동안 행자는 일을 통해 마을에서 찌든 몸과 마음의 습관을 깨끗이 씻어내고

절 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예절이며 의식을 익힌 뒤에 계()를 받아 스님이 된다.

요즘은 이 기간이 짧아져서 대게 여섯달로 끝나지만 수월이 살던 시대에는 삼 년이 보통이었다.

수월이 천장암을 찾아간 지 일 년쯤 되었을 때

수월의 뒤를 이어 열네 살의 어린 동자가 수행자가 되려고 천장암을 찾아왔다.

 

이 동자가 바로 계룡산 동학사에서 경허를 만난 인연으로 뒷날 큰 선지식이 된 만공스님이다.

어린 만공은 경허가 써준 소개장을 품에 간직하고 그 먼 길을 걸어서 외진 천장암까지 찾아온 것이다.

그해 부처님 성도일인 섣달 초파일에 만공은 사미계를 받고 이름을 월면이라고 했다.

그 뒤 월면은 이 절에서 밥 짓는 공양주가 되어 여러 해를 지내게 된다.

그 무렵 천진도인으로 이름난 혜월(慧月)도 천장암을 찾아왔다.

혜월은 열다섯 살 때 정혜사에서 계를 받고 공양주 일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정혜사를 찾아온 경허의 한바탕 천지를 뒤흔드는 설법에 휘말려들어 개심사를 거쳐 천장암에 이른 것이다.

혜월은 천장암에서 밭일을 즐겨했다.

그는 경허가 천장암에 들를 때면 틈틈이 경허가 머무는 방에 들어가 보조스님이 지은 수심결을 배웠다고 한다.

 

만공은 수월보다 열여섯 살 아래고, 혜월은 아홉살 아래였다.

경허는 많은 제자를 두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특히 수월, 혜월, 만공이 가장 뛰어난 제자로 인정받고 있다.

이 세 걸출을 일컬어 " 경허의 세 달 " 이라고 부른다.

이 시절 세 사람은 함께 모여 이런 다짐을 했다고 한다.

"우리, 신명을 다 바쳐 부처님의 가르침을 펴자. 한 사람은 북쪽에서, 한 사람은 남쪽에서,

그리고 한 사람은 여기 남아 부처님의 가르침을 펴자."

 

이 말이 얼마나 사실에 가까운지는 알 수 없지만

뒷날 수월은 북쪽에서, 혜월은 남쪽에서, 그리고 만공은 그 중간에서 불법을 편 것으로 보아

이 아름다운 약속 또한 꾸민 말만은 아닌것 같다.

당시 수월은 스님이 아닌 행자로 땔감을 해서 나르고 있었지만 생각해보면

당시 이들이 머물던 천장암이야말로 가히 "환상의 수행처" 였음이 분명하다 

천하의 큰 안목인 경허가 문수보살마냥 문득문득 나타났다 사라지는 맑고 조용한 절,

수월은 말없이 나무를 하고, 혜월은 묵묵히 밭을 갈고, 만공은 번뇌 없는 손길로 밥을 짓는다.

이 어찌 만고에 다시 보기 어려운 기막힌 영산회상(靈山會上)풍경이 아니겠는가!

 

뒷날 만공은 수행하는 데 갖추어야 할 세 가지로 도량, 도반, 스승을 들었는데,

이것은 끝끝네 잊을 수 없는 천장암 수행 시절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수월은 자비롭고, 혜월은 천진하고, 만공은 속이 넓었다.

이들이 연출했을 천장암의 수행 풍경은 당나라 때의 유명한 스님인 한산 습득 풍간이 역어낸

저 천태가풍을 방불케 하는 데가 있다.

남쪽으로 내려간 혜월은 일생을 밭을 일구며 살았는데

그의 밭일 하는 솜씨는 아무래도 천장암 시절에 맏형인 수월에게서 배운 실력 같다.

 

수월이 주로 한 일은 땔나무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일은 온 산이 나무 천지인 연암산에서는 식은 죽 먹기였다.

그래서 아우 혜월을 도와 밭일을 하기도 하고 절 아래 물레방앗간에 가서 양식도 찧어 오고

밥 짓는 막내 만공을 도와서 불도 지펴주었을 것이다.

수월은 천수경(千手經)을 좋아했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천수경"을 외었다.

나무를 하면서도 외우고, 밥을 먹으면서도 외우고 꿈을 꾸면서도 외우고, 외우면서도 외우고 ....

 

우연한 기회에 수월스님에 대한 자료를 보게되면서 선지식의 발자취를 따라 선향(禪香)을 따라

생활을 하며서 다소 흐트러졌던 마음을 잡는 기회로 삼기 위해 수월스님 전기를 올려보기로 했습니다.

옛 선사들의 발자취를 따라 함께 가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