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도인과 선사

성우 경허(惺牛 鏡虛) 선사

敎當 2016. 7. 11. 13:40

 

근세 한국불교의 중흥조로 첫 손가락에 꼽히는 분이 바로 성우 경허(惺牛 鏡虛) 선사.

만일 경허 큰스님이 없었다면 우리 나라 근세불교는 그야말로 얼마나 적막강산이었을까 하고 걱정할 만큼,

경허 큰스님은 꺼져가던 우리불교의 불씨를 되살려 횃불로 활활 타오르게 해주신 큰 스승이었다.

그래서 어떤 이는 경허 큰스님을 한국의 달마대사라 칭송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2의 원효대사로 추앙하기도 한다.

 

만공(滿空), 혜월(慧月), 침운(枕雲), 수월(水月), 한암(漢岩)

실로 기라성 같은 거봉들을 문하에서 배출하여 한국불교를 화려하게 중흥시킨 경허 큰스님.

스님은 1849년 헌종 15824일 전북 전주 자동리에서 여산 송씨(宋氏) 두옥(斗玉)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바람에 가세가 기울어 형은 출가하여 스님이 되어 있었고,

9살의 나이에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지금의 청계산 청계사에 맡겨져 불문에 들었다.

 

 

그후 계허 스님 문하에서 5년간 글공부를 하고 속퇴하는 계허 스님이 천거하여

계룡산 동학사 만화(萬化) 스님께 보내니 이때 스님의 나이 겨우 14세였다.

동학사에서 9년 동안 모든 불교경전은 물론 유교와 노장(老莊), 선도(仙道)까지 섭렵하고

23세의 젊은 나이에 동학사 강사가 되었고 은사를 만나기 위해 상경하던 중

호열자가 창궐한 어느 마을에 들렀다가 생사의 위기에 직면,

홀연 발길을 되돌려 동학사로 돌아와 학인들을 내보내고 비장한 각오로 참선에 돌입하여

3개월만에 오도하여 문을 박차고 나왔다.

 

홀연히 어떤 사람으로부터 고삐 뚫을 구멍 없다는 말을 듣고

몰록 깨닫고 나니 삼천대천세계가 이 내 집일레.

6월 연암산 아랫길에 들사람 일이 없어 태평가를 부르네.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이 없어 의발을 누구에게 전할꼬

의발을 누구에게 전할꼬.

 

이렇게 오도가를 부른 경허 큰스님은 이후 천장암, 개심사, 부석사, 해인사, 범어사, 오대산 월정사와 금강산을 거쳐

석왕사 등 천산만락(千山萬樂)을 누비며 때로는 기상천외한 법문으로,

때로는 기상천외한 기행으로 수많은 제자와 중생을 제도하며 꺼져가던 근세불교의 불씨를 되살렸다.

 

옷속 이 새 옷에 다 옮기고 입어

 

경허 큰스님은 깨달음을 얻은 뒤 보임 공부를 위해 거처를 천장암으로 옮겼다.

마침 속가의 형이었던 태허 스님이 천장암 암주로 있었는데,

경허 스님은 천장암에서 좀 떨어진 산 속에 있는 지장암에 홀로 계시면서 보임 공부에 몰입해 있었다.

몇 달이고 옷도 바꾸어 입지 않고 세수도 하지 않았으므로 옷 속에는 말 그대로 이 떼가 득시글거렸다.

얼마나 많은 이 떼가 득시글거렸는지 스님의 온 몸은 이 떼에게 뜯겨 짓물러 있을 지경이었다.

하루에 한번 공양을 갖다드리던 사미가 보다 못해

헌옷을 벗으시고 새 옷으로 갈아입으시라고 간청했지만 스님은 번번히 거절했다.

이렇게 몇 달이 지나고 보니 입고 있던 옷이 땟국물과 이 떼로 범벅이 되어버렸다.

더 이상 사미의 간청을 뿌리칠 수 없게되자 마지못해 경허 스님은 새 옷으로 갈아입기로 했다 

그런데 스님은 그 많은 이들을 새 옷에 다 옮긴 후에야 갈아입었다.

불살생, 자비. 우리 중생들은 흔히 불살생, 자비를 가르침 속에서만 만나고 있지는 않을까.

 

경허 스님이 천장암에 계실 때의 일이었다.

어느 여름날 밤, 제자 만공이 등불을 켜들고 큰방으로 들어가니 경허 스님께서 누워 계셨다.

그런데 불빛에 비춰보니 경허 스님의 배 위에 시커먼 독사가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게 아닌가.

제자 만공이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질렀다.

 “스님, 스님 배위에 독사가 앉아 있습니다요 스님!”

그러나 경허 스님은 눈 한번 깜박이지 않으신 채 담담히 대답했다.

실컷 놀다가 가게 그냥 내버려두어라.”

만공은 어쩔줄 몰라 절절 매고 있었는데 이윽고 독사가 스스로 또아리를 풀고 슬슬 배위에서 내려와 뒷문으로 사라졌다.

나중에 경허 스님께서 만공에게 이르셨다.

이런 일을 당했을 때 적어도 마음에 조금도 동요됨이 없어야 공부가 되느니라.” 

 

불살생·자비 실천 모범

 

경허 스님이 오랫동안 주석했던 천장암은 지금도 가난한 작은 암자라

신심 깊은 불자들만 참배할 뿐 관광객은 별로 찾지 않는다.

최근에는 천장암으로 올라가는 길이 잘 다듬어져서 참배객들에게 별 불편을 주지 않지만,

경허 스님께서 머무시던 조선조 말에는 그야말로 벽촌 오지에 자리잡고 있는 천장암이라

신도도 그리 많지 않았고 절 살림도 어렵기 그지없었다.

걸핏하면 조석 끓일 양식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더더구나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시대였고 백성들의 살림 또한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시절이었으니

시주금이 넉넉히 들어올리 없었고 공양미인들 넉넉히 가져올리 없었다.

 

그래서 그때 천장암에 계시던 스님들은 누구나 바랑을 메고 멀리 해미읍까지 탁발을 나가시곤 했었다.

물론 경허 스님도 직접 탁발을 나가셨는데

하루는 경허 스님이 해미읍 어느 솟을대문 앞에서 탁발을 하기 위해 목탁을 치며 염불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밥술 깨나 먹고 삼직한 솟을대문이 열리더니

행세 깨나 하고 사는 양반이 거드름을 피우며 경허 스님께 힐문하는 것이었다.

 

우리 집 대문 앞에 와서 목탁을 치는 것을 보니 곡식이라도 좀 얻어가자는 것 같은데,

그대는 과연 중이란 말인가, 거렁뱅이란 말인가?”

경허 스님은 합장하여 예를 갖춘 후에 나직히 대답했다.

 “절에서 살며 수행하고 있으니 중이 분명하옵고, 오늘은 양식을 탁발하러 왔으니 거렁뱅이 또한 분명한가 합니다.”

 

경허 스님이 이렇게 대답하자 그 양반은 그만 할말을 잃고

범상치 않은 스님의 기품에 눌려 무례를 사죄하고 극진히 안으로 모셔 크게 시주하였다.

이렇듯 억불숭유정책의 시절에도 홍성, 해미 인근의 유생들이 경허 스님의 덕화에 감동하여

천장암 중창불사에 크게 동참한 기록들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으니,

스님의 기품이 어떠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라.

 

경허 큰스님이 서산의 천장암에 계실 때의 일이다 

하루는 경허 큰스님의 형이신 천장암 주지 태허 스님이

인근에 사는 갈산 김씨네 49재를 올리기 위해 장을 크게 보아다가 온갖 떡과 과일을 푸짐하게 진설해 놓았다.

이 당시만 해도 백성들이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때라 동네에 큰 제사나 잔치가 있다고 하면

떡과 과일을 얻어먹기 위해 인근 마을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드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천장암에서 아무날 아무시 갈산 김씨네 49재가 있다는 소문을 들은 인근 마을 사람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천장암으로 모여들었다

 

산 사람에 공양물 보시

 

법당 안에 차려진 온갖 떡과 과일, 동네 아이들은 허기진 배를 쓰다듬으며 군침부터 삼키고 있었다.

이윽고, 49재를 올리기 위해 태허 주지 스님이 법당으로 들어오고 경허 큰스님도 법당 안으로 들어섰다.

지극정성으로 49재를 올려 조상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갈산 김씨네 가족들도 엄숙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제 막 49재를 올리려는 참이었다.

그런데, 법당 밖에 구름처럼 몰려와서 법당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동네 사람들을 한바퀴 둘러보고 난 경허 큰스님이

느닷없이 법상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시더니 아직 제사도 지내기 전에

떡과 과일을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들고는 법당 밖에 서있던 동네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닥치는 대로 나눠 주는게 아닌가.

 

주지 태허 스님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니 세상에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아직 제사도 지내기 전에 떡과 과일을 나눠줘 버리다니!.” 

상주들도 어안이 벙벙해서 할말을 잃고 있었다.

이 때 경허 큰스님이 한 말씀하셨다.

 “제사는 바로 이렇게 지내는 게 제대로 지내는 것입니다.

영가께서 극락 왕생하려면 좋은 일, 착한 일을 많이 베풀어야하는 법이거늘,

여기 모인 이 배고픈 사람들에게 떡과 과일을 보시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오늘의 이 공덕으로 영가께서는 반드시 극락왕생 하실 것이오.” 

이 말씀을 듣고 난 상주들은 기쁜 마음이 되어 고개를 끄덕이며 경허 큰스님께 합장 배례했다.

 

경허 큰스님은 제자 만공을 데리고 탁발을 나가시곤 하였다.

어느 해 여름 두 스님은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탁발한 곡식을 걸망에 짊어지고 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루 종일 탁발을 하느라 돌아다녔으니 몸은 고단하고 걸망은 무거웠다.

젊은 만공이 먼저 지쳐 경허 큰스님께 통사정을 했다 

스님, 걸망이 무거워서 더 이상 걸어가기가 힘듭니다. 잠시만 쉬었다 가시지요.”

경허 큰스님이 제자 만공에게 말씀하셨다.

두 가지 중에 한가지를 버려라.”

두 가지 중에 한가지를 버리라니요?”

무겁다는 생각을 버리든지, 아니면 걸망을 버리든지 하란 말이다.”

에이 참 스님두, 하루 종일 고생해서 탁발한 곡식을 어찌 버리란 말씀이십니까요?

아 그리구 무거운 건 무거운건데 그 생각을 어찌 버립니까요?”

 

경허 큰스님은 휘적휘적 앞서가기 시작했다. 제자 만공이 허겁지겁 숨을 헐떡이며 뒤따라 갔다 

스님, 정말 숨이 차서 그렇습니다. 잠시만 쉬었다 가시지요.”

저 마을 앞까지만 가면, 내 힘들지 않게 해줄 것이니 어서 따라 오너라.” 

제자는 마을 앞까지만 가면 힘들지 않게 해준다는 말에 혹시나 하고 스승의 뒤를 부지런히 따라갔다.

마을 앞에는 우물이 있었고 그 근처 논밭에서는 농부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때마침 한 아낙이 우물에서 물을 길러 물동이를 이고 스님들 앞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경허 큰스님이 느닷없이 그 아낙에게 달려들어 입을 맞추어 버렸다 

 

도망칠 적에도 무겁더냐?

 

에그머니나!  아낙이 비명을 지르며 물동이가 박살이 났다.

이 모습을 지켜본 마을 사람들이 손에 손에 몽둥이를 들고 삽을 들고 괭이를 들고 저 중놈들 잡아라!” 외치며 달려왔다 

참으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제자 만공은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죽어라 뛰었다.

경허 큰스님은 벌써 저만치 앞서서 달아나고 있었다.

얼마나 죽을힘을 다해 달리고 달렸을까.

이제는 마을 사람들이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다.

저만치 솔밭에서 경허 큰스님이 제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허허 너도 용케 붙잡히지 않고 예까지 왔구나.”

스님, 속인도 해서는 안될 짓을 왜 하셨습니까요?”

그래, 그건 그대 말이 맞다. 헌데 도망쳐 올적에도 걸망이 무겁더냐?”

예에?”

그 순간 만공은 깨달았다. 모든 것이 마음의 장난이라는 것을

 

인연 없는 중생은 어쩔 수 없구나

 

경허 큰스님이 가야산 해인사의 조실로 계실 때의 일이다.

경허 큰스님은 이미 곡차와 육식을 거리낌없이 들고 계시는 터라 젊은 수행자들 사이에서는 이러쿵 저러쿵 시비가 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 겨울, 북풍한설이 몹시도 몰아치던 날 수건으로 얼굴을 뒤집어쓴 어느 젊은 아낙이 경허 큰스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날부터 경허 큰스님은 그 아낙과 한방을 쓰고, 공양도 그 아낙과 겸상으로 드셨다.

수행자들 사이에 다시 말이 많아졌다.

아무리 도통한 큰스님이시기를 곡차에, 육식에 이제는 여색까지 탐하시다니, 이건 너무 하신게 아닌가! 

이틀, 사흘, 나흘이 지나자 제자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스승께 읍소했다.

 

스님, 제발 그 여자를 그만 내치시옵소서.”

제자들이 하두 이렇게 읍소를 하자, 드디어 방문이 열리고 문제의 그 아낙이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앞에서 자세히 살펴보니, 그 아낙은 나병에 걸려 코도 없고 얼굴도 문드러진 중환자였다.

그 아낙은 울면서 말했다 

큰스님께서 따뜻한 방에 재워주시고, 따뜻한 밥 먹여주시고 고름까지 닦아 주셨으니 이제 곧 죽어도 애한이 없사옵니다.” 

그러면서 그 아낙은 정처 없이 떠났다.

그리고 그 후 경허 큰스님도 걸망하나 메고 해인사를 떠나면서 말했다 

인연 없는 중생은 별 수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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