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도인과 선사

혜월(慧月)스님

敎當 2016. 6. 22. 15:53

혜월(慧月)스님은 경허선사의 수제자 가운데 한분이었다.

스님은 1861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는데 속성은 신()씨였다.

예산 정혜사에서 득도하였고 1884년 천장암에서 경허선사로부터 보조국사 지눌의 수심결을 배우면서부터 글공부를 시작,

처절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경허선사로부터 인가를 받아 그대는 남방에 인연이 있으니 남쪽으로 내려가라

스승의 분부에 따라 선산의 도리사, 팔공산의 파계사, 울산의 마타암, 통도사의 극락암, 천성산 내원사, 부산 선암사에서

선풍을 크게 드날리고 1937년 부산 금정산 안양암에서 세수 77. 법랍 66세로 입적했다. 

 

까막눈의 일자무식으로 출가 

혜월스님은 어려서 글공부를 해본 일이 없는 까막눈이었다.

경허선사를 천장암에서 모시고 있던 혜월은 어느 날 경허선사께 글공부를 가르쳐달라고 간청했다. 

뒤늦게 글공부는 무슨 글공부를 하겠다고 그러는가?”

글 공부 하는데 이르고 뒤늦고 가 어디 따로 있겠습니까? 배우면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디 한번 배워 보게나.”

 

혜월은 그날부터 경허선사로부터 수심결을 배우며 마음 닦는 법과 한문, 두 가지를 한꺼번에 익히게 되었다.

그후 혜월은 불교의 진리가 글자 속에 있지 아니함을 깨닫고 바위 밑에 뚫린 토굴속에 들어가 오직 화두참구에 매달렸다.

때는 엄동설한, 바위굴 속의 돌바닥위에 정좌하고 며칠동안 화두만 들고 있었으니 온몸이 얼음처럼 얼어갔지만

혜월은 몸이 얼어 굳어 가는 것도 잊은 채 참선삼매에 빠져 있었다.

 

혜월이 바위 밑 토굴에 들어간지 7일째 되던날,

경허선사와 만공이 토굴속으로 들아가보니 혜월의 몸은 이미 얼어서 굳어있었다. 

이것 보게 만공, 혜월의 몸이 얼어 앉은채로 굳어버렸어.”

스님, 날씨가 너무 추워 얼어죽었나 봅니다.”

아니야. 눈빛이 아직 살아 있으니 죽지는 않았어. 어서 가서 따뜻한 물이나 갖고 오게나.”

 

만공이 천장암으로 급히 내려가 더운물을 가져다가 가까스로 혜월을 구했다.

혜월은 짚신 삼는 솜씨가 뛰어나서 남이 한 켤레 삼을 동안에 세 켤레를 너끈히 삼아내는 탁월한 솜씨를 보여주곤 했다.

그리고 틈만 나면 짚신을 삼아서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아무나 필요한 사람이 신도록 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알았다.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채 토굴속에서 참선삼매에 빠져있던 어느 날,

스승 경허선사가 짚단을 토굴 안으로 던져 넣으며 한마디 하셨다. 

내일은 먼길을 떠나야겠으니 짚신이나 한 켤레 삼아 주게나.”


혜월은 스승의 분부를 받자 곧바로 짚신을 삼기 시작했다.

그리고 짚신을 다 삼은 후 마지막 손질을 하느라고 나무망치로 짚신을 탁탁 두드렸다.

그 순간, 나무망치 소리에 천하의 문이 활짝 열렸다.

드디어 깨달음의 한순간이 혜월에게 찾아온 것이었다.

혜월은 감격과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경허선사께 달려갔다.


그대는 대체 참선은 무엇하러 하는가?”

못에는 물고기가 뛰고 있습니다.”

허면 자네는 지금 어디에 있는고?”

산꼭대기에 바람이 지나 갑니다.”

 

경허선사는 그 자리에서 혜월이 한 소식 얻었음을 인가하시고 전법 게송을 내린 뒤

 그대는 남쪽에 인연이 있으니 이 길로 남쪽으로 내려가라고 일렀다.

그리고 제자가 마지막으로 삼아준 짚신을 신고 천장암을 떠났고, 혜월 또한 그 길로 남쪽으로 향했다.

이것이 스승과 제자의 마지막 이별이 될 줄이야 혜월이 어찌 상상이나 했으랴.

 

혜월스님이 양산의 내원사에 계실 때의 일이었다.

어느 여름날 스님이 출타하려고 산길을 내려가고 있었는데 계곡 냇물에서 한무리의 아이들이 물고기를 신나게 잡고 있었다.

스님이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아이들이 들고 있는 바구니 안에는 이미 잡아놓은 물고기들이 몇 마리 펄떡거리고 있었다.

 

이 물고기들 모두 너희들이 잡은 것이냐?”

예 스님. 우리들이 잡았심니더.”

그 그럼 말이다. 이 물고기 모두다 나한테 팔아라.”

? 아니 물고기를 팔라니요?”

내가 값을 후하게 쳐줄 것이니, 이 물고기들 다 나한테 팔란 말이다.”

값을 후하게 쳐주신다구요?”

그래 그래. 그 돈으로 너희들은 사탕이나 사먹으면 그게 더 좋지 않겠느냐?”


헤월스님은 기어이 아이들을 달래 후한 값을 쳐주고 바구니에 담겨있던 물고기를 모두 다 샀다.

그런데 물고기 바구니를 건네 받은 혜월스님은 그 자리에서 물고기들을 냇물에 풀어주었다.

바구니에 갇혀있던 물고기들은 그야말로 이제야 살았다는 듯이 흐르는 물결을 따라 뿔뿔이 흩어져 떠내려갔다.

아이들이 다시 소리를 지르며 물고기를 잡으러 쫓아 내려가더니 여기 저기서 잡았다. 잡았다.”하며 소리를 질렀다.

<!--[endif]-->결국 혜월스님이 돈을 주고 사서 냇물에 풀어주었던 물고기들은 대부분 다시 잡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혜월스님은 이번에도 또 후한 값을 쳐주고 그 물고기들을 모두 다 사서 또 다시 냇물에 풀어 주었다.

그러나 물고기는 또 금방 아이들 손에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혜월스님은 이번에도 또 돈을 주고 물고기를 사서 냇물에 풀어주었다.

세상에 참 별 이상스러운 스님도 다 있다는 듯, 아이들이 스님을 이상스런 눈빛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스님, 왜 물고기를 돈주고 사서 자꾸 냇물에 풀어 주시는 겁니까?”

왜는 인석들아, 물고기들이 불쌍해서 그런다.”

불쌍해서요?”

그래. 헌데 이번에는 또 안잡을거냐?”

 

아이들은 그제서야 멋쩍은듯, 고개를 가로 저으며 시무룩하게 말했다. 

이자 그만 잡을랍니더.”

그리고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기 잡던 도구들을 챙겨 산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혜월스님은 그제서야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자무식으로 출가득도 했던 스님, 혜월스님은 바로 그런 스님이셨다.

 

혜월스님은 그의 스승 경허선사를 그대로 빼어 닮은 듯 무심도인(無心道人)이었고 천진무구, 그 자체였다.

스님은 티없이 맑은 어린애를 지극히 좋아했고 끔찍이 사랑했다.

혜월스님이 팔공산 파계사의 미타암에 머물고 계실 때는

열두살짜리 동자승을 큰스님이라 부르며 아침 저녁 문안까지 드리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출타할 적에도 반드시 동자승에게 어디 어디 다녀오겠습니다인사를 올릴 정도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다른 스님들이 하도 민망해서

왜 나이 어린 동자에게 큰스님대접을 하느냐고 따졌더니 혜월스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일하시기를 좋아한 개간선사

 

생각이 티없이 맑고 깨끗한 동자승이야말로 천진불(天眞佛)이니 그래서 큰스님이지.”

천성이 천진무구했던 혜월스님은 아이 뿐만 아니라 들짐승 날짐승도 무척 아끼고 사랑했다.

까마귀, 까치들도 혜월스님의 마음을 헤아렸던지 스님의 어깨 위에 내려 앉기도 하고

팔뚝에 앉아 스님이 주는 모이를 먹기도 했다. 

혜월스님은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백장청규를 철저히 지킨 스님이셨다.

 

1920 ~ 1930년대, 덕숭산의 만공스님은 사찰중창불사에 으뜸이요,

혜월스님은 개간(開墾)하는데 으뜸이라는 말이 퍼질 정도로 틈만 나면 스님은 괭이를 들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논밭을 일구었다.

비가 오거나 밤이 되면 스님은 짚신을 삼고 새끼줄을 꼬았고, 날이 개이면 괭이를 들고 땅을 팠다.

이렇듯 쉴틈없이 일을 좋아했고 농사를 즐겼던 스님은 자연히 절에서 소를 키웠고 지극정성으로 소를 보살폈다. 

낮에 쟁기질이라도 시킨 날에는,

스님은 소에게 미안한 마음을 느낀 나머지 맛있는 여물을 손수 쑤어서 푸짐히 먹이면서 소에게 말했다.

 

"우순(于順), 미안하다.

그대신 농사철만 지나면 편안히 잘 모실테니 그리 알아라.

그리고 우순이 니는 이생에서 부지런히 잘 닦아서 요 다음 생에는 소의 몸을 벗어야 한다.”

스님은 늘 이렇게 소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정을 나누었고 설법까지 해주는 것이었다.

 

스님이 금정산 선암사에 계실 적에 있었던 일이었다.

어느 날 밤, 절에 소도둑이 들어 스님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소 우순이가 사라져버렸다.

이른 새벽에 이 사실을 알게된 혜월스님은 절에 있던 모든 스님들을 깨워 소도둑을 잡도록 했다.

그리고 스님은 허겁지겁 산등성이로 올라갔다.

절에 있던 스님들이 이 산, 저 산, 아무리 뒤져보았지만 소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산등성이에 올라간 혜월 스님은 두 손으로 손나팔을 만들어 애절한 목속리로 소를 부르기 시작했다

우순아 - 우순아 - 우순아 - ”


혜월스님이 소의 이름을 부르며 애통해하자 옆에 있던 스님이 한마디 했다.

아이구 참 스님은, 소가 제 이름을 어찌 어찌 알아먹겠습니까? 그만 하시고 내려 가입시더.”

아니다. 우순이는 제 이름을 알아 먹는다. 우순아 - 우순아 - 우순아 --”

스님은 더욱 목청을 높여 우순이를 불렀다. 바로 그때였다.

저 산 아래쪽 계곡에서 움머어~” 소 울음소리가 들여오기 시작했다.

우순아 - 우순아 - ”

움머어 - 움머어 - ”

봐라. 저 아래 골짜기에 우순이가 있다!”

소를 찾던 젊은 스님들이 소 울음소리가 들려온 계곡으로 우루루 쫓아 내려갔다.

절에서 키우던 소 우순이를 끌고 가던 소도둑은 소를 소나무 기둥에 묶어둔 채 숲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우순이가 움머어 - ” 울어대는 바람에 소재가 발각되어 꼼짝없이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젊은 스님들이 소도둑에게 달려들어 주먹다짐을 했다.

혜월스님은 젊은 스님들을 가로 막았다 

소를 찾았으면 됐지 사람을 왜 패느냐?”

스님은 소도둑을 일으켜 세워 어디 다친대는 없느냐고 위로까지 해준뒤 어서 달아나라고 길을 열어 주었다. 

무심도인 혜월스님은 소를 무사히 찾은 것만 반가웠을 뿐, 도둑에 대한 미움이나 처벌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그토록 일을 즐겼고 농사 짓는 것을 좋아했던 혜월스님은

양산의 내원사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여전히 또 개간선사(開墾禪師)’였다.

조실스님이 틈만 나면 괭이를 들고 땅을 파시니, 자연 그 절에 있던 젊은 스님들도 별수없이 호된 대중울력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혜월스님은 젊은 스님들에게 고된 울력을 시키면서도 먹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보리밥에 된장, 간장, 시레기국이 고작이였다.

조실인 혜월스님은 평생토록 그 정도면 대만족이었지만,

한창 나이의 젊은 스님들은 그런 부실한 공양만으로 고된 울력을 감당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혜월스님이 절을 비우고 부산에 나가셨다.

바로 그날, 고봉(高峰)이라는 젊은 스님이 몇몇 스님들과 작당하여

혜월조실스님이 애지중지 키워온 소를 끌고 내려가 양산시장에 내다 팔아버렸다.

그리고는 그 돈으로 곡차를 마시고 절로 돌아와 뭉칫돈을 원주에게 내놓으며

대중공양에 맛있는 반찬을 장만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덕분에 내원사 대중들은 오랜만에 푸짐한 반찬에 그야말로 멋진 공양상을 받아먹게 되었다.

 

내가 찾는 건 송아지가 아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부산에 출타하셨던 조실 혜월스님이 내원사로 돌아와 보니 그토록 애지중지 키워온 소가 없었다 

혜월스님은 누가 내 소를 어디로 가져갔느냐, 당장 내 소를 찾아오라고 소리를 지르셨다.

대중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모두들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때, 소를 팔자고 제안했던 고봉이 느닷없이 옷을 홀랑 벗어버리고 벌거벗은 몸으로

조실스님 방으로 들어가더니 음메에... 음메에...’ 하면서 송아지 울음소리를 내며 방안을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혜월스님은 단박에 고봉이 저지른 일임을 알아차리시고 고봉의 발가벗은 엉덩이를 찰싹 때리며 말했다 

이 녀석아, 내가 찾는 소는 어미소지, 너같은 송아지가 아니다.”

그 한마디로 그만이었다.

더 이상 소에 대해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더 이상 묻지도 않았다.

나이든 무심도인과 아직 젊은 무심도인. 그분들은 그렇게 말없는 큰 가르침을 주고 받았다.

 

혜월 스님이 부산 선암사에 계실 때의 일이었다.

스님은 가끔 대중법회를 열고 설법을 하셨는데

나에게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활인검(活人劍)과 사인검(死人劍), 두 자루의 명검이 있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러나 사람을 살린다는 활인검도, 사람을 죽인다는 사인검도 스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실제로 보여준 일이 없었다.

그래서 혜월 스님이 가지고 계신다는 두 자루의 명검 그야말로 신비의 베일 속에 가려져 있었다.

 

직접 보여준 두 자루의 칼

 

천하의 명검에 대한 소문은 신도들의 입에서 입을 통해 널리 퍼져 나가게 되었다.

이 무렵, 경상남도 전지역을 관할하고 있던 일본인 헌병대장이 바로 이 명검에 대한 소문을 듣고 호기심이 발동했다 

사람을 죽이는 명검은 당연히 있을 수 있겠지만, 사람을 살리는 명검이 있다니, 이건 정말 처음 들어보는 소리가 아닌가.

그 헌병대장은 도저히 궁금증을 견딜 수 없어 곧바로 선암사로 올라갔다.

사람을 살린다는 활인검과 사람을 죽인다는 사인검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혜월 스님은 산에 나무하러 가시고 없었다.


한참을 기다리고 있자니 허름한 차림의 스님이 지게에 나뭇짐을 지고 내려왔다.

바로 저 스님이 활인검, 사인검을 늘 가슴에 품고 다니시는 혜월 선사라는 말을 시자로부터 들은 헌병대장은

우선 스님의 외모를 보고 적잖이 실망했다.

활인검, 사인검의 명검을 지닌 선사라면 풍모부터 우선 그럴 듯 하리라고 상상했었는데

나뭇짐을 지고 내려온 혜월선사의 모습은 너무 초라했던 것이었다 

스님께서 활인검, 사인검, 명검을 가지고 계신다기에 그걸 구경하러 왔소이다.”

그러신가. 그럼 보여줄테니 나를 따라 오시게.”


혜월 스님은 섬돌 축대위로 성큼성큼 올라가셨다.

헌병대장도 스님의 뒤를 따라 섬돌 축대 위로 올라갔다.

그 순간, 스님이 느닷없이 돌아서서 헌병대장의 뺨을 후려쳤다.

헌병대장은 순식간에 축대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스님이 축대 밑으로 내려와 한 손을 내밀어 헌병대장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방금 전, 당신의 뺨을 때린 손이 죽이는 칼이요, 지금 당신을 일으켜 세우는 손은 살리는 칼이오.”

헌병대장은 그제서야 크게 깨닫고 스님께 삼배를 올리고 돌아갔다.


혜월 스님이 부산 금정산 선암사에 계실 때의 일이었다.

한 신도가 제법 많은 돈을 내놓으면서 돌아가신 자기 아버지의 49재를 올려달라고 부탁했다.

혜월 스님의 상좌는 이 뭉칫돈을 혜월 스님에게 맡겨놓고

하루전날 대중들을 데리고 시장을 보기 위해 시내로 내려가면서 혜월 스님께 말씀드렸다

스님, 내일 아침 공양드시고 그 돈 가지고 시장으로 오십시오. 장은 제가 먼저 봐놓겠습니다.”

그래, 알았다. 내일 아침 돈 가지고 내려가마.”

 

제사는 이미 마쳤느니라

 

이렇게 약속하고 혜월 스님은 제자를 내려보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스님은 약속한대로 시장값을 치룰 돈을 들고 산을 내려갔다.

그런데 한참 시장을 향해 길을 가다가 보니, 양쪽다리가 둘 다 잘린 불쌍한 걸인이 길거리에 나앉은채 구걸을 하고 있었다.

혜월 스님은 그 걸인을 본 순간, 주머니에 담고 있던 돈을 통째로 꺼내 그 걸인에게 다 주어버렸다.

49재 재사지낼 물건을 잔뜩 흥정해서 챙겨둔 채

스님이 돈가지고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상좌가 반갑게 맞이하며 손을 내밀었다 

값을 치르게 돈을 주시지요.”

재수는 필요없다. 도로 물려라.”

무슨 말씀이십니까. 스님?”

내 오는 길에 49재 이미 잘 지내고 왔다. 물건을 돌려주고 그만 돌아가자.” 

혜월 스님의 은사 경허선사는 천장암에서 49재 음식을 제사지내기도 전에

동네 아이들에게 다 나누어주고 제사 잘 마쳤다고 한 일이 있거니와,

그 스승에 그 제자답게 혜원 또한 그러하고 그러하였다.

 

개간한 논 세마지기 보고 흐뭇

 

개간선사로 불리울만큼 혜월 스님은 논을 만들고 밭 일구는 일을 좋아했다.

혜월 스님이 양산 내원사에 계실 때, 스님은 느닷없이 어느 사람의 꼬임대로 문전옥답 다섯마지기를 싼 값에 팔았다.

그리고는 그 논 다섯마지기 판 돈으로 산으로 올라가서 산자락과 산자락 사이의 계곡에 다람이 논을 만들기 시작했다.

잡목을 베어내고, 풀을 뽑고 돌을 캐내고 뚝을 쌓아 천수답을 개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품삯을 받고 천수답 개간작업에 나선 일꾼들이 일하기 싫어지자 꾀를 내어 혜월 스님께 법문 한자리 해주이소졸라댔다.

스님이 이 청을 물리치지 않고 법문을 해주시면 그럭저럭 또 하루해가 저물었다.

 

이렇게 쉬며 놀며 개간작업을 하다보니 문전옥답 다섯마지기 판 돈이 품삯으로 다 들어갔는데도

산골짜기 천수답은 겨우 세마지기 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도 스님은 논 세마지기 개간한 것을 매우 흡족히 여기시고 아침마다 산에 올라가 새 논을 내려다보시며 즐거워하셨다.

옆에서 보다 못해 제자가 한마디했다.

스님, 문전옥답 다섯마지기 팔아서, 산비탈에 자갈논 만들었으니 이건 이만저만한 손해가 아닌데

그게 뭐 그리 좋다고 즐거워 하십니까요?”

 

중의 계산법이 왜 그 모양이냐

 

그러자 혜월 스님은 크게 꾸짖었다.

이놈아, 문전옥답 다섯마지기는 그대로 있지,

논 판 돈은 조선사람들이 품삯으로 받아 그 동안 잘먹고 잘살았지,

산비탈에 없던 논 세마지기가 새로 생겼으니, 이거야말로 이윤을 보아도 크게 본건데 그게 어찌 손해라고 그러느냐?”

아니, 스님. 그게 손해가 아니라 이득을 보셨단 말씀이십니까요?”

인석아, 너는 어찌 중이 되어가지고도 계산법이 그 모양이냐? 나는 이득을 보아도 아주 크게 보았느니라.”

 

천하의 도인, 혜월 선사의 그 엄청난 큰 눈에

어찌 나의 것, 남의 것을 가름하는 소유권등기의 개념이 가당키나 했을 것인가.

깨달은 눈으로 보면 천하가 다 내 것이요, 천하가 다 남의 것이거늘,

여기에 감히 어찌 다섯마지기, 세마지기의 크고 작음이 자리할 것인가.

속물의 계산법이 부끄럽고 또 부끄러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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