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도인과 선사

만공 스님

敎當 2016. 6. 17. 14:10

5백년 이어진 숭유배불정책으로 조선시대의 불교는 그야말로 근근히 그 맥을 이어오다가

조선조말 경허 선사의 등장으로 홀연 불교증흥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00년대 우리나라 불교계에서는 () 오대산에 방한암이 있고,

() 덕숭산에 송만공이 있다는 말이 든든한 버팀목처럼 회자되고 있었다.

그만큼 오대산의 한암 스님과 덕숭산의 만공 스님은 당시 우리 불교계를 상징하는 두 거목이셨다.

    

송만공(宋滿空) 스님은 187137, 전라북도 태인읍에서 출생,

14세의 어린 나이로 야반도주하여

봉서사, 송광사, 쌍계사를 거쳐 계룡산 동학사에서 진암(眞岩) 노사(老師)문하에 머물다가

천하의 선지식 경허 선사를 만나 충남 서산의 천장암에서

경허 선사의 속가 형인 태허 스님을 은사로, 경허 선사를 계사로 득도,

월면(月面)이라는 법명을 받고 사미승이 되었다.

그후 천장암 마곡사의 토굴에서 수행하였고 부석사를 거쳐 통도사의 백운암에서 마침내 두 번째 깨달음을 얻어

경허 선사로부터 인가를 받고 만공이라는 법호와 함께 전법게를 받았다.

 

이후 만공 스님은 금강산 마하연을 비롯 명산대찰에서 수행하였고

충남 예산의 덕숭산에 머물며 수덕사, 정혜사, 견성암을 중창하고 기라성 같은 제자들을 길러내며 선풍을 드날리다가

19461020, 세수 76, 법랍 62세로 열반에 들었다.

 

옛날 부처님 살아계실 때, 아난존자가 부처님을 입안의 혀처럼 극진히 시봉했다고 불전(佛傳)은 전하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만공은 그의 스승 경허 선사를 얼마나 존경하고 얼마나 극진히 모셨는지 모른다.  

만공이 젊었을 때, 경허 선사를 모시고 해인사에서 수행하고 있었다.

이 때 경허 선사는 술과 고기를 마다 않으시고 드시는지라 일부 수행자들 간에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당시 해인사의 눈푸른 선객이었던 제산 스님과 주지 남전 스님은

남들이 뭐라고 하건 경허 선사께 곡차와 고기안주를 올려드렸다.

 

나는 누가 뭐라고 하든, 경허 큰 스님께는 곡차와 닭고기를 계속 올릴 것이오.”

주지였던 남전 스님도 맞장구를 쳤다.

경허 큰 스님같은 어른을 위해서라면 나는 닭 아니라 소라도 잡아 올리기를 서슴지 않겠소.”  

이 때 만공 스님은 결연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제가 만일 경허 큰 스님을 모시고 깊은 산속에 살다가 양식이 떨어져 공양 올릴 것이 없게 된다면,

저는 기꺼이 제 살점을 점점이 오려서라도 스님을 봉양할 각오입니다.”

그만큼 스승 경허는 제자 만공에게 절대적인 존재였으니,

오늘날에 과연 이토록 극진히 스승을 모시는 제자가 남아 있을까.

    

만공 스님은 참으로 지혜와 복덕을 두루 갖춘 분이었다.

모든 백성들이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있던 시절이라 큰절이건, 작은 절이건 늘 양식조차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만공 스님이 와 계시기만 하면 그 절에는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시주도 줄을 이어서 절살림이 금방 넉넉해지곤 하였다.

 

어느날 비구니 일엽(一葉) 스님이 만공 스님께 여쭈었다.

스님 참 이상한 일입니다.

스님께서 금강산 마하연에 계실 때도 그랬고, 이 수덕사도 그렇고, 스님이 계시기 전에는 끼니걱정하기 바빴는데,

스님께서 머물기만 하시면 시주가 줄을 이어 양식 걱정을 안하게 되니,

스님께서는 대체 전생에 무슨 복을 그리도 많이 지으셨습니까?”

전생에 내가 고생고생 해가면서 저축을 좀 해 두었더니 그게 지금 돌아오는 거야.”

무슨 저축을 어떻게 하셨는데요?”

만공 스님은 잠시 허공을 쳐다보시더니 말씀을 이어 나갔다.


전생에 나는 여자였느니라. 그것도 복도 지지리도 없는 여자였다.

부모복도, 형제간 복도 없는 박복한 여자였어.

그래서 전라도 전주땅에서 기생노릇을 했었지.”

예에? 기생을요?”

그 때 내가 육보시(肉布施)를 좀 했지. 그리고 버는 돈이 있으면 굶은 사람들 양식을 사다 주고,

전주 봉서사에 계신 스님들 양식도 대어드리고... 그 때 그 양식들이 저축이 되어서 이제 조금씩 돌아오는 거야.”

 

만공 스님은 조금도 스스럼없이 당신의 전생이야기를 제자들에게 들려주시고는 하였다.

당신께서는 3생 전에 전주에서 향란이라는 기생노릇을 했는데,

그 때 바로 진묵대사께서 전주 봉서사에 계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후생에는 장수였고, 바로 전생에는 소였다고 말씀하셨다.

 

아니 스님께서 바로 전생에 소였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전생이 빚을 갚느라고 소로 태어났었는데,

소노릇을 하면서도 제대로 빚을 못 갚아 그 남은 빚을 갚으려고 중이 되었다.”

소로 사셨으면 빚을 다 갚으셨을 텐데 무슨 빚이 또 남으셨다는 말씀입니까?”

이 녀석아! 소도 소 나름이지. 여물만 배터지게 먹고 일할 때 게으름을 피우면

소노릇을 하면서도 빚을 갚기는커녕 오히려 빚을 늘이는 거야.

그러니 너희들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옛스님들은 이렇게 경계하셨느니라.

출가승려라고 해서 신도들이 갖다 주는 시주물을 받아 먹고 중노릇을 게을리 해서 불도를 제대로 이루지 못하면,

이는 신도들의 재물을 도적질한 것과 같은 것이니, 마땅히 죽어서 소가 되어 그 빚을 갚아야 하는 것이야.

무슨 말인지 알아 들었느냐?”  

오늘 우리 중생, 한 사람 한 사람은 과연 어떠한가?

전생에 진 빚을 이생에 갚아나가기는커녕, 행여라도 새로운 빚을 늘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겸허한 마음으로 되돌아볼 일이다.

 

1930년대 말경,

만공스님이 충남 예산의 덕숭산 수덕사에 주석하고 계실때의 일이었다.

당시 만공스님을 시봉하고 있던 어린 나이의 진성사미(오늘의 수덕사 원담 노스님)는 어느날

사하촌(寺下村)의 짓궂은 나뭇꾼들을 따라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재미있는 노래를 가르쳐줄 것이니 따라 부르라는 나뭇꾼들의 말에 속아 시키는 대로 딱따구리노래를 배우게 되었다.

 

저 산의 딱따구리는 생나무 구멍도 잘 뚫는데 우리집 멍터구리는 뚫린 구멍도 못 뚫는구나.“

 

이 노래는 그야말로 음란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아직 세상물정을 몰랐던 철없는 나이의 진성사미는 이 노랫말에 담긴 음란한 뜻을 알 리가 없었다.

그래서 진성사미는 이 노래를 배운 이후, 절안을 왔다갔다 하면서도

제법 구성지게 목청을 올려 이 해괴한 노래를 부르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진성사미가 한창 신이 나서 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마침 만공스님께서 지나가시다가 이 노래를 듣게 되었다.

스님은 어린사미를 불러 세웠다.

  

네가 부른 그 노래, 참 좋은 노래로구나, 잊어버리지 말거라.”

, 큰스님.”

    

진성사미는 큰스님의 칭찬에 신이 났다.

그러던 어느 봄날, 서울에 있는 이왕가(李王家)의 상궁과 나인들이 노스님을 찾아뵙고 법문을 청하였다.

만공스님은 쾌히 청을 승낙하시더니 마참 좋은 법문이 있느니 들어보라 하시면서 진성사미를 불러 들였다.  

네가 부르던 그 딱따구리 노래, 여기서 한번 불러 보아라.”  

많은 여자손님들 앞에서 느닷없이 딱따구리 노래를 부르라는 노스님의 분부에 어린 진성사미는 얼굴이 붉어졌지만,

그전에 노스님께서 그 노래를 칭찬해주신 일도 있고 해서 목청껏 소리 높여 멋들어지게 딱따구리 노래를 불러 제꼈다.

 

저 산의 딱따구리는 생나무 구멍도 자알 뚫는데.”  

철없는 어린사미가 이 노래를 불러대는 동안 왕궁에서 내려온 청신녀(淸信女)들은

얼굴을 붉힌채 어찌할줄을 모르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때 만공스님께서 한 말씀하셨다.  

바로 이 노래속에 인간을 가르치는 만고불력의 직설 핵심 법문이 있소.

마음이 깨끗하고 밝은 사람은 딱따구리 법문에서 많은 것을 얻을 것이나,

마음이 더러운 사람은 이 노래에서 한낱 추악한 잡념을 일으킬 것이오.

원래 참법문은 맑고 아름답고 더럽고 추한 경지를 넘어선 것이오.

 

범부중생은 부처와 똑같은 불성을 갖추어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

누구나 뚫린 부처씨앗이라는 것을 모르는 멍텅구리오.

뚫린 이치을 찾는 것이 바로 불법(佛法)이오.

삼독과 환상의 노예가 된 어리석은 중생들이라 참으로 불쌍한 멍텅구리인 것이오.

진리는 지극히 가까운데 있소.

큰길은 막힘과 걸림이 없어 원래 훤히 뚫린 것이기 때문에 지극히 가깝고,

결국 이 노래는 뚫린 이치도 제대로 못찾는, 딱따구리만도 못한 세상 사람들을 풍자한 훌륭한 법문이 것이오.”  

만공스님의 법문이 끝나자 그제서야 청신녀들은 합장배례하며 감사히 여겼다.

 

서울 왕궁으로 돌아간 궁녀들이 이 딱따구리 법문을 윤비(尹妃)에게 소상히 전해 올리자 윤비도 크게 감동,

딱따구리 노래를 부른 어린 사미를 왕궁으로 초청, ‘딱따구리노래가 또 한 번 왕궁에서 불려진 일도 있었다.  

만공스님은 조선총독 앞에서도 할 소리를 하신 무서운 스님이셨지만, 또 한편으로는 천진무구한 소년같은 분이셨다.  

특히 제자들이 다 보는 앞에서 어린이처럼 손짓 발짓으로 춤을 추며 누름갱이 노래를 부르실 때는

모두들 너무 웃어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오랑께루 강께루/ 정지문뒤 성께루/ 누름개를 중께루/ 먹음께루 종께루.”

 

우리나라 불교계에서 첫째 가는 선객이신 만공선사는 또한 타고난 풍류객의 끼를 지닌 멋쟁이 스님이셨다.  

1930년대 중반, 운현궁에 있던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剛)이 민공스님께 귀의하면서

그 신돌()로 스님께서 원하시면 무엇이든 한가지 드리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만공스님은 주저없이 운현궁에 내려오는 거문고를 달라고 하였다.

이 거문고는 고려때 것으로

역대 왕조의 임금들 가운데서 가장 풍류를 즐겼던 공민왕이 신령한 오동나무를 얻어 만든 신품명기(神品名器),

조선왕조 대대로 전해내려오며 대원군을 거쳐 의친왕에게 전해진 가보중의 가보.

통근 의친왕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 거문고를 밤중에 수채구멍을 통해 내보내

선학원에 머물고 계신 만공스님께 전하게 했다  

만공스님은 이 보물같은 거문고를 소림초당에 걸어두고

명월이 만공산하면 초당앞 계곡에 놓인 갱진교에서 현현법곡(泫泫法曲)을 타면서 노래를 불렀다.

 

흐르는 물소리는 조사의 서래곡이요 너울거리는 나뭇잎은 가섭의 춤이로세.”

     

만공스님은 당신 스스로에게는 물론 제자들에게 늘 당부하셨다.  

주인공아, 정신차려 살필지어다.

나를 낳아 기르신 부모의 은혜를 아느냐?

모든 것을 보호하여주는 나라의 은혜를 아느냐?

모든 씀씀이를 위해 가져다주는 시주의 은혜를 아느냐?

정법을 가르쳐주는 스님의 은혜를 아느냐?

서로 탁마하는 대중의 은혜를 아느냐?

이 더러운 몸이 생각생각에 썩어가고 있음을 알고 있느냐?

사람의 목숨이 호흡사이에 있음을 알고 있느냐?

중생이 가이 없는지라 서원코 건져야할 것이며, 번뇌가 다함이 없는지라 서원코 끊어야할 것이며,

법문이 한량이 없는지라 서원코 배워야할 것이며, 불도가 위 없는지라 서원코 이루어야 할 것이니라.”

 

해방된 이듬해인 19461020일 아침, 만공스님은 목욕 단좌한 후

거울에 비친 당신의 모습을 보고 거울속의 만공에게 마지막 이별을 고하였다.

여보게, 자네와 내가 이제 이별할 때가 되었네 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