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그리고 이야기/사는이야기

내가 본 영화-곡성(哭聲)

敎當 2016. 6. 1. 12:02

지난 토요일에도 산행을 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일주일에 한번 하는 산행이라 조금 욕심을 부리다 보니

어느새 기본적으로 6시간을 걷다보니 거리로는 약 24km가 습관이 되었다.

일요일은 미세먼지 보도도 있었고 해서 하루 종일 집에서 수련을 하다

문득 그냥 영화를 한편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요일 오후 사무실에서 영화 곡성을 본 사람의 얘기도 들은 터라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해 보니

오후 420분에 상영을 하는 지근거리의 영화관이 있었다.

그래서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쇼핑도 할 겸 해서 조금 일찍 집을 나섰다.

얼마 만에 혼자 보는 영화인지 설램 반 두려움(?) 반으로 예매를 하러 나섰다.

 

난 곡성이라는 것이 전라도 어디 지방이름인지 곡소리인지도 모르고 무작정 갔다.

영화관에 가서야 곡성이 전남 곡성(谷城)이 아니라 죽으면 하는 곡소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역이름인 곡성이면 어떻고 곡소리면 어떠랴 싶어 별 신경 쓰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영화관에 가 보니 1만원 하고도 1천원이 관람료였다.

예전에 중학교 다닐 때만 하더라도 학교에서 영화 보는 것을 금지했었는데

하지 말라는 규제 때문에 짜릿한 반항심이 있었는지 영화를 즐겨봤는데

어떤 경우에는 영화를 보고 싶어도 다 본 영화라 볼 곳이 없어 못 본 경우도 있었다.

때로는 자율학습 시간에 몰래 영화관에 갔다가 선생한테 들키기도 했으니

얌전하게 모범적으로 학창시절을 보냈다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면도 있었나 보다...ㅎㅎㅎ

 

곡성을 본 사람은 명확하게 기승전결이 구분이 안 되어 있어서 혼란스럽기도 했을 듯하다.

어쩌면 2시간 넘게 영화를 보는 내내 귀신만을 쫒다가 마지막에는

이게뭐야? 하는 허탈한 생각에 울컥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을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어떤 사람이

먼저 영화를 본 조카가 보지 말라고 했을 때 말을 들었어야 했다면서 후회하는 말에서

이 사람도 영화를 보는 내내 귀신만 보다 나왔다는 사실을 알고 웃음이 나왔다...ㅎㅎㅎ

그렇다고 나라고 뭐 뚜렷한 어떤 것을 본 건 아니지만 오랜만에 과거 학창시절을 떠 올리며

그냥 내 나름대로 영화를 본 소감을 적어 보려고 한다.

 

중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이 영화를 보면 학칙에 어긋난다면서 정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미리 얘기를 하고 감상문을 작성 해 오면 용서(?)를 해 주다는 말에 미리 얘기를 하고

영화 감상문을 쓴 전력이 있어서 그 기분으로 써 보려고 한다.

곡성이라는 영화가 감독이 의도를 했건 안 했건 기존의 명확한 결말과 달리 모호하게 끝나면서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과연 이 영화는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나름 분석을 엄청 많이 해 놓아 영화에 대한 관심으로 회자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 자의던지 타의던지 나도 그 대열에 동참을 하고 있으니...^^

 

내 생각이 옳던지 그르던지 내 느낌을 적은 것이고 그냥 내 블러그에 내가 쓰는 것이니

타박하지 않고 읽어 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이 영화는 인간 내면의 의식의 변화를 영화라는 매개를 통해서 보여준다.

곡성의 조용한 마을에 사람이 죽으면서 이야기는 시작이 된다.

종구(곽도원)는 직업이 경찰관으로 사람이 죽었다는 연락을 받은 그는 현장출동을 하려는데

아침밥은 먹고 가라는 아내의 말에 못 이기는 채 밥상을 받고

딸 효진(김환희)의 밥 위에 김을 얹어주는 여유를 보인다.

현장에 도착한 종구는 참혹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면서 직업의식으로 인해

왜 죽었는지에 관한 의심을 품게 되고 버섯이 원인이 아닐까 의심하지만

버섯은 명확하게 원인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면서 또 다른 이유를 찾아야만 한다.

그 대안으로 찾은 이유가 외지인(쿠니무라준)이다.

 

어떤 사건이 있으면 왜 발생을 했는지 그 원인이 궁금해지고 이런 욕구는 상상의 나래를 펴고

천태만상으로 피어나면서 주변의 가까운 사람이 문제의 중심이기 보다는 비교적 나와는 상관이 없는

먼 곳이기를 바라면서 찾으려 하는데 그 대상이 외지인이 된 것이다.

외지인이 범인이라서 잘못되더라도 나와는 큰 연관이 없어 괴롭거나 슬퍼할 이유가 없다.

일단 마음이 움직여 의심을 하면(더구나 살인사건과 같은 일이라면)

마음은 극한 상황으로 치달아 괴물로까지 연관 지어 진다는 것이다.

일본인인 외지인은 그런 이유에서는 딱 적임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번 의심 지어진 생각은 그 대상을 괴물로 둔갑을 시키고

꿈에서는 죽은 동물의 살을 뜯어 먹고 피를 빨아먹는 마치 흡혈귀와 같은 형상으로 보인다.

끔이라고 표현을 했지만 생각이라는 것도 꿈과 같은 범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왜곡된 생각(편견)은 일본인을 그리고 외지인을 또 홀로 동떨어져 접촉 없이 사는 사람을

괴물(혹은 악마)과 동일시하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런 일련의 사건이 만약 마을사람에게만 일어났다면 사건은 확대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내 딸이 이상증세를 보이고 사건의 중심인물이 되면서

처음에는 다소 소극적이고 여유롭기까지 하던 종구는 적극적으로 사건 깊숙이 개입하게 된다.

외지인의 집은 소통이 잘 안 되는 외딴 곳으로 집을 지키는 사납게 생긴 개와 까마귀

그리고 알 수 없는 의식이 치러진 듯 한 제단과 사진으로 인해서

이 외지인이 사건의 중심인물이라는 확신에 더 접근하게 된다.

하지만 사건 현장을 직접 본 것도 아니고 확실한 물증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다소 논리와는 거리가 있는 떠나라는 경고와 더불어 죽이겠다는 엄포를 놓는다.

편견에 의해 만들어진 마음은 실체가 아니라서 애초부터 논리적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논리보다는 감정에 의한 행동이나 언어가 앞설 수 밖에 없다.

 

종구는 아픈 딸을 위해서 일광(황정민)에게 굿을 의뢰 한다.

일광은 항아리 속에 죽어있는 까마귀를 단번에 알아차려 어느 정도 신통과 신뢰를 쌓는다.

일광은 외지인의 대항마다.

어떤 편견에 의해 만들어진 인격(신격이나 악마일수도 있지만 영화에서는 외지인)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는 또 다른 인격(황정민)이 지목하면서

희미하던 실체는 점점 구체화되기 시작하고 선과 악 혹은 신과 악마가 되어 마음속에서는 걷잡을 수 없는 싸움이 시작된다.

그러다 급기야는 종구와 건강원 사람들과 함께 외지인을 찾아가서

좀비(?)를 만나 혈투를 벌이듯이 집단최면 비슷해지며 상황은 더 악화된다.

 

이 영화를 보고 왜 마음의 작용인 편견을 감독이 얘기를 하려고 했다는 확신이 들었냐면

낫이라는 흉기를 들고 외지인을 찾아간 부사제가 악마인지 아닌지를 묻자

이미 악마라고 단정을 짓고 왔는데 내가 악마라고 하지 않는다고 해서

악마가 아니라고 봐 줄리 없을 것이라는 대사에서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알았다.

사실 낚시라는 것도 감독이 던져놓은 미끼라고 생각을 한다.

어떤 것이 물릴지 모르는게 미끼인데 생각이라는 놈은 단초를 제공하면 어떤 생각이 물릴지

그 누구도 모르고 한번 꿰인 낚시바늘은 쉽게 그 곳(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외지인이나 일광이나 미끼일 뿐이다.

종구는 그것을 문 물고기처럼 편견으로 시작된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갈팡질팡 한다.

 

여기에 반해서 나타나 진실처럼 말을 해 주는 무명(전우희)은 누구일까?

난 종구의 마음이 투영된 결과물이라고 생각을 한다.

외지인이나 일광을 같은 부류로 보는 이유는 일광이 옷을 갈아입는 과정에서

훈도시를 입고 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외지인은 겉과 속이 일본인이고

일광은 겉으로는 한국인이지만 내면은 일본인과 같은 즉 동질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보여지는 조건에 의해서 외지인은 바로 의심의 여지없이 나쁜악마가 되었고

일광은 도움을 주려는 선한 인물로 극중에서 낙인되어 있을 뿐이지만

일광의 차에 실린 상자에서 외지인과 같은 사진이 도로에 쏟아져 내린 장면을 기억한다면

일광도 보여지는 것에 의해 철저하게 감춰진 위선일 뿐이다.

외지인이 생각()속의 인물이라면 일광은 보여지는() 것에 의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그에 비해서 무명(전우희)인은 선악의 단초가 될 만한 어떤 단서도 찾을 수 없다.

극 후반부에 일광과 외지인 사이에서 갈등을 하는 종구에게 무명인은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면 다 죽는다고 한다.

 

이 장면에서 베드로가 예수를 배반하면서 닭이 세 번 울기까지

많은 갈등을 겪고 있었다는 것은 성경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난 종구가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면 죽는다는 것을 이렇게 생각 한다.

닭이 세 번 우는 동안은 시간상으로 짧다면 짧고 길다면 엄청 긴 시간일 것이다.

이처럼 같은 시간인데도 길거나 혹은 짧게 느껴지는 것은 생각의 차이다.

어찌되었건 어떤 일에 있어서 이런 고뇌와 번민 없이 편견에 의해 결정(집으로 가는)하는 것은

때로는 다 죽이는 것처럼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했다는 것은

너무 비약적인 상상일지 모르지만 난 이 장면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이 영화에 나오는 전우희는 극중 이름이 없어 많은 사람이 무명(無名)이라고 한다.

같은 음이지만 한자가 다른 무명(無明)이라는 것을 불교에서는 어리석음이라고 하는데

내 마음에 무명이 끼어 자신의 본질(혹은 본성)을 바로 보지 못해서 부처를 이룰 수 없다고 하는데

극중에서 이름이 없음으로 해서 무명이라 불려지게 했다는 것이 우연의 일치일까...^^

이 영화가 마음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사가 또 있다.

악마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라서 살아있지도 죽지도 않는다는 것이 그것이다.

마음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은 결국 마음이 사라져야 없어지는 것인만큼

형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실체가 없는 것도 아니라서 신과 인간의 경계처럼 모호한 간극을 유지하고 있다.

결국 마음이 문제인 것이고 편견이 문제인 것이다.

이런 마음의 작용인 편견을 깨지 못한다면 미끼를 문 물고기처럼 이리 끄달리고 저리 끄달리면서

꿈속에서 꿈을 찾는 그런 삶 속에서 악몽처럼 헤메다 생을 마칠지도 모른다.

이런 미몽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곡성은 끊이지 않을 것이며 영화는 끝이 났지만

마음속에서는 아직도 곡성은 끝나지 않고 상영이 될 것입니다.

 

영화 곡성얘기는 이쯤에서 마치기로 하고 진짜 귀신 얘기를 해 드리려고 합니다.

귀신하면 어떤 모습이 떠오르십니까?

보통 우리 기억 속에 각인되어진 귀신의 모습은 하얀 소복을 입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입에 피를 흘리면서 걷는 것이 아니라 허공을 날아다니는 모습이 아닐까 상각합니다.

왜냐하면 영화나 드라마에서 이렇게 묘사되어 세뇌(?)당한 흔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일종의 편견일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본 귀신은 우리 모습과 별다르지 않았습니다.

같은 귀신인데도 보는 사람에 따라 모습에 차이가 있었는데

큰스님은 노인이라고 하시고 전 50대 아주머니로 본 적도 있었으니 마음의 작용이 달라 생긴 일이 아닌가 합니다.

하지만 전생에 도를 닦았던 사람 같다는 것에는 일치를 봤으니..ㅎㅎㅎ

 

귀신은 에너지의 집합체라 생각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절대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라서 때론 뇌에서 에너지의 간섭을 받아

어떤 형체로 투영되기도 하기 때문에 모습으로 보일 때도 있읍니다.

어떤 음식을 맛보고도 어떤 사람은 맛있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맛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다르거나 틀린 문제가 아니고 각자의 마음이 투영된 결과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귀신(혹은 신)이 좋거나 나쁜 존재가 아니고 그걸 받아들이는 내 마음의 작용에 의해서

좋게도 혹은 나쁘게도 작용을 하기 때문에 귀신 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결국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작용에 의해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부동산을 블러그를 통해서 하다보니 초기에 글을 읽으신 분 중에는

글이 순수해서 좋게 생각을 하고 지금 글을 읽으신 분들은 전문성이 있어서 좋다고 합니다.

이를 나쁜 관점에서 보면 초기의 글을 읽으신 분들은 초보냄새가 나서

많은 자금이 들어가는 부동산 투자금을 맡기기에는 미덥지 않고

현재의 글을 보신 분들은 너무 잘 알아서 만나면 말발(?)에 속아서 휘둘릴까봐 걱정이 된다고 생각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걱정하기로 한다면 이래도 걱정이고 저래도 걱정일 것이며 좋게 보기로 한다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을 것입니다.

한가지 대상을 보고서도 이처럼 마음에 따라 좋게 혹은 나쁘게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장 좋은 방법은 편견이나 분별심을 버리고 순수한 본연의 마음자리에서 받아들여

판단을 하는 것이 가장 휘둘리지 않는 현명한 판단이 될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내어야 새벽에 닭이 세 번 울 동안의 시간이 길지도 짧지도 않게 느껴지고

지옥불 같은 편견과 혼란의 생각에서 고요한 마음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일어나는 불길이 꺼진 고요한 상태를 니르바다(열반)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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