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도인과 선사

초의선사 의순(草衣禪師 意恂 : 1786∼1866)

敎當 2015. 11. 6. 13:53

조선 후기의 대선사(大禪師)이자 다도(茶道)의 정립자로 성은 장씨이다.

 자는 중부(中孚), 호는 초의(草衣), 당호는 일지암(一枝庵). 무안출신으로 

15세 때에 강변에서 놀다가 탁류에 떨어져 죽을 고비에 다다랐을 때

부근에 있던 승려가 건져주어 살게 되었다.

 

그 승려가 출가할 것을 권하여 16세 때 남평 운흥 (雲興寺)에서 민성(敏聖)을 은사로 삼아 득도하고

대흥사(大興寺)에서 민호(玟虎)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22세 때부터 전국의 선지식(善知識)들을 찾아가 삼장(三藏)을 배워서 통달하였을 뿐 아니라

대오(大悟)하여 유일(有一)의 선지(禪旨)를 이어받았다 

불교학 이외에도 유학·도교 등 여러 교학에 통달하였고, 범서(梵書)에도 능통하였다.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대흥사의 동쪽 계속으로 들어가 일지암을 짓고

40여년 동안 홀로 지관(止觀)에 전념하면서 불이선(不二禪)이 오의(奧義)를 찾아 정진하였으며,

다선삼매(茶禪三昧)에 들기도 하였다 

또한 모든 것을 구비한 인간이 될 것을 주장하면서 <동다송(東茶頌)>을 제작하여 다생활의 멋을 설명하였고,

범패와 원예 및 서예에도 능하였으며, 장 담그는 법, 화초 기르는 법, 단방약 등에도 능하였다.

그의 사상은 선사상(禪思想)과 다선일미사상(茶禪一味思想)으로 집약된다.

 

선사상은 저서인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에 잘 나타나 있다.

<선문사변만어>는 당대의 유명한 대선사 백파(白坡)<선문수경(禪門手鏡)>이라는 저술을 발표하자

의순이 선배 백파의 잘못을 하나하나 변등하기 위하여 저술한 것이다.

 

백파는 선을 조사선(祖師禪여래선(如來禪의리선(義理禪)3종으로 나누어 설명하였으나,

의순은 선을 3종으로 판별하는 것부터가 잘못이라고 보고,

조사선과 여래선, 격외선(格外禪)과 의리선 등의 사변(四辨)을 중심으로

백파와는 다른 의견을 제시하였다 

또한, 의순이 전선(專禪)으로 기울지 않고 지관을 수행하였다고 하는 데에서 그의 선사상의 큰 특색을 찾아볼 수 있다.

 

그의 다선일미사상은 차와 선이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데에서 시작된다.

 의순은 차를 마시되 '법희선열식(法喜禪悅食)'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한잔의 차를 통하여 법희선열을 맛본다고 한 것은 바로 다선일미사상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그는 차의 성품이 삿됨이 없어서 어떠한 욕심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라고 보았고,

때묻지 않은 본래의 원천과도 같은 것이라고 하여 무착바라밀(無着波羅蜜)이라고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

차의 진예없는 정기를 마시거늘 어찌 큰 도를 이룰 날이 멀다고만 하겠는가(塵穢除盡精氣入大道得成何遠哉)!라고 하였다.

의순의 다도는 불을 피우고 물을 끓이며,

그 잘 끓은 물과 좋은 차를 적절히 조합하여 마시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생활이었다.

 

그의 생애는 오로지 좌선하는 일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일상생활 속에서 멋을 찾고 불법(佛法)을 구하고자 노력하는 데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언제나 '제법불이(諸法不二)'를 강조하였다.

 

그에게는 차와 선이 별개의 둘이 아니고,

시와 그림이 둘이 아니며 시와 선이 둘이 아니었다.

1866년 나이 80, 법랍 65세로 입적하였다.

평범한 일생을 통하여 선()과 교()의 한쪽에 국집함이 없이 수도하고 중생을 제도하였으며,

이상적 불교인으로 존경한 인물은 진묵(震默)이었다.

 

그는 또한 대흥사 13대종사 중 13번째 대종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둔사지(大芚寺誌)>는 의순을 생략하고 있다.

이는 <대둔사지>의 편자가 의순이었기 때문이며,

실제로는 마지막으로 그를 쳐서 13대종사라고 부르는 것이 관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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