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도인과 선사

부설거사

敎當 2015. 2. 12. 16:38

한국 불교 1,600년사를 빛낸 인물 가운데는 고승 대덕이 아닌 재가불자도 몇 분이 있다.

비록 환속한 거사의 신분이지만 승려 시절에 못지않게 더욱 진하고 뜨거운 신앙심으로

구법 구도를 위해 정진하고 대자대비의 장엄한 보살행으로 일생을 보낸 분도 있다.

이를테면 거룩한 순교자 이차돈(異次頓)과 불국사 창건주 김대성(金大成)이 출가 승려가 아니라 재가불자였으며,

원효성사(元曉聖師)와 설잠(雪岑) 김시습(金時習),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같은 이름난 고승도

뒷날 환속하였으나 거사로서 우리 불교사에 잊을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신라시대의 부설거사(浮雪居士) 역시 파계환속하여 머리를 기르고 가정을 가졌지만

웬만한 국사니 왕사니 하는 고승 못지않은 투철한 신앙심으로 불법수행에 용맹정진하여

재가성도(在家成道)의 모범을 보인 선구자였다.

부설거사의 일생은 거의 신비로운 전설에 싸여 있고

그의 발자취를 전해주는 기록 역시 작자와 연대 미상의 <부설전> 뿐이다.

이 책에 따르면 그는 선덕여왕(재위 632646) 때에 태어나 어린 나이에 출가하였다가 환속하여

신문왕(재위 681691) 때에 부안 변산의 월명암을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전북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의 쌍선봉은 높이가 해발 459로서 변산의 최고봉인 의상봉(509) 다음으로 높은 봉우리이다.

변산 8의 하나로 꼽히는 월명암 낙조

바로 이 쌍선봉 정상부에 있는 월명암 부근 낙조대에서 바라보는 석양의 황홀경을 가리킨다.

월명암은 부설거사가 신문왕 때에 창건했다고 하나 아직까지 정확한 창건 연대가 밝혀진 것도 아니다.

일설에는 691(신무왕 11)에 창건했다고 하나 분명하지 않다.

그 뒤에 1597(선조 25)에 진묵대사(震黙大師)에 의해 재건되었으며,

1848(헌종 14) 또는 1863(철종 14)에 성암화상(性庵和尙)이 삼창했지만

항일의병전쟁 때인 1908년에 의병의 거점이라고 하여 왜경에 의해 불태워져버렸다.

그리고 1914년에 당시 주지로 있던 백학명선사(白鶴鳴禪師)가 재건했으나

또다시 625전쟁 직전에 이곳으로 숨어든 여순반란군 일부의 방화로 완전히 소실된 것을

1954년부터 월인(月印)원경(圓鏡)소공(簫箜)도전(道田)종흥(宗興) 스님 등에 의해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근세의 고승인 해안선사(海眼禪師)도 한때 월명암에서 수행했다.

이처럼 월명암이 1,300년의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숱하게 불타고 부서지고 무너져버렸지만

불사조처럼 재건 중창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부처님의 대자대비한 가호와

월명암을 창건한 부설거사의 비상한 신앙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부설전>의 첫머리에 부설거사는 신라의 선덕여왕이 즉위할 무렵,

그러니까 632년께 서라벌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본명은 진광세(陳光世)로서 자질이 총명하고 비범했으며 어린 나이에 불국사에서 출가하여

원정(圓淨) 스님의 제자가 되어 부설이란 법명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진광세-부설이 출가했다는 불국사는 그가 태어난 선덕여왕 때보다 120년이나 뒤에 창건되었다.)

어쨌든 어린 나이에 출가한 부설에게는 동년배인 영희(靈熙)와 영조(靈照)라는 도반이 있었다.

함께 불경을 공부하던 세 사람의 젊은이는

좀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 불법의 오묘한 깨달음을 얻기로 작정하고 함께 길을 떠났다.

 

서라벌을 떠난 세 사람은 서쪽으로 향해 지리산천관산두륜산무등산을 거쳐

이번에는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백양산내장산을 거쳐 능가산, 현재의 변산에 이르렀다.

변산의 절경에 반한 이들은 지금 월명암 자리보다 약간 높은 곳에

묘적암(妙寂庵)이란 초암을 짓고 한동안 수행하다가 문수도량인 오대산 적멸보궁을 찾아가기로 했다.

세 사람이 길을 떠나 두릉, 오늘의 김제 만경 땅에 이르렀을 때

해가 저물어 어느 집에서 하룻밤을 묵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집의 주인은 신심이 두터운 재가불자 구무원(仇無寃)이라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묘화(妙花)라는 아리따운 외동딸이 있었다.

그런데 이 무슨 야릇한 운명의 사슬인가.

부설의 준수한 용모와 낭랑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법문에 빠진 묘화의 가슴속에서

걷잡을 수 없는 연정의 불길이 맹렬히 타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묘화는 부모에게 저 스님에게 시집가지 못한다면 죽어버리겠노라고 하소연하며 매달렸다.

끔찍이 사랑하는 외동딸이 목숨을 걸고 사랑을 하소연하는 상대방이 하필이면 출가한 스님일 줄이야!

하지만 구무원은 딸의 간절한 소망을 뿌리칠 수 없어 부설에게 이런 사정을 털어놓고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셈치고 딸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간청했다.

부설이 듣기에 이처럼 황당무계한 일이 또 어디에 있을까 싶었다.

출가 삭발하고 부처님께 온몸과 마음을 바친 승려에게 구혼을 하다니.

 

처음에는 매정하게 뿌리치고 떠나버릴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대로 떠나버리는 일이 못할 짓 같기도 했다.

나 아니면 죽겠다고 애타게 발버둥치고 몸부림치는 처녀를 나 몰라라 하고

내팽개쳐버리고 떠난다는 것도 참으로 비정하고 무자비한 짓으로 여겨졌다.

나 하나 때문에 죽겠다는 사람을 못 본 체 내버리고 떠나서 무슨 득도를 하고 성불을 하랴.

꼭 산중과 절간에서만 불도를 닦고 불법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닐 터.

내 한 몸이 파계 환속하여 한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설령 성불을 못해도 후회하지 않으리라.

이렇게 결심한 부설은 두 도반과 작별하고 그 집에 주저앉아 구무원의 사위가 되었다.

부설 스님에서 부설거사로 변신했던 것이다.

 

그러나 부설거사는 묘화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농사를 짓고 살면서도 불법의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부인 묘화도 불법 수행에 매우 열심이었다.

그러는 사이 아들 등운(謄雲 : 登雲)과 딸 월명(月明)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흐른 뒤 어느 날,

그 옛날 부설과 헤어져 오대산으로 떠났던 영희와 영조 스님이 찾아왔다.

두 스님은 그 동안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열심히 수행하고 나름대로 깨우침을 얻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서라벌로 돌아가는 길에 부설을 찾아왔던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세 사람의 대화는 자연히 그 동안의 불법 수행이나 득도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 끝에 서로의 법력을 겨루어보기로 하여

부설거사가 물을 가득 담은 항아리 세 개를 천장에 매달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두 도반은 오랫동안 문수보살의 진신이 계신 성지에서 수행하셨으니

두 분의 높은 법력으로써 이런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오.

, 이제 이 방망이로 항아리를 치되 물이 쏟아지지는 않게 해보시오.”

 

영희와 영조는 참으로 난감했다.

아무리 그 동안 계율을 지키며 수행했다고는 하지만 그런 정도의 공력을 쌓지는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두 사람은 차례로 방망이를 들어 항아리를 쳤는데 아니나 다를까,

항아리가 깨어짐과 동시에 그 속의 물이 모두 쏟아져버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 조화 속인가. 부설이 방망이를 들고 후려치자 항아리는 모두 깨어졌건만

그 안에 들었던 물은 마치 얼음으로 변한 것처럼 항아리에 담겼던 모양 그대로

대롱대롱 허공중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이 설화는 아무리 출가를 하여 승려가 되었다고 하여도 진정으로 속세를 여의고

참된 수행을 하지 않는다면 겉모습만 스님일 뿐이요,

비록 파계를 하고 환속을 하여 거사가 되었다고 해도 일심전력으로 수행 정진한다면

고승 대덕 못지않은 신앙심으로 득도 성불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일러준다고 하겠다.

 

두 사람의 옛 도반에게 참된 깨우침의 길을 비상한 법력공력으로 보여준 부설은

그 뒤에도 한층 정진의 길을 멈추지 않았다.

또한 자신과 부인 묘화의 뒤를 따라 삼보(三寶)에 귀의한

아들과 딸의 이름을 딴 수행도량인 등운암과 월명암을 창건하였으니,

월명암은 불타고 없어지기를 수 차례나 거듭하면서도 끈질긴 재건 중창을 통해 남아 있는 오늘날의 월명암이요,

월명암보다 좀더 높은 곳에 있었다는 등운암은 임진왜란 때 전소된 이후 아직까지 옛 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두 자녀를 위해 암자를 지어준 부설거사는 부인 묘화를 위해서는 묘적암을,

자신은 부설암을 지어 각자 불도에 정진하다가 이승의 인연이 다하여 어느 날 부처님 곁으로 돌아갔다.

부설거사가 입적한 뒤에 등운과 월명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고 <부설전>은 전한다.

월명암에 부목한이 하나가 있었는데 월명의 빼어난 자태에 반하여 매일같이 끈질기게 구애를 했다.

참다못한 월명이 오라비에게 그런 사실을 고했더니 등운은 그의 소원이 그렇게 간절하다면 한 번 들어주라고 했다.

월명이 오라비의 말대로 그에게 몸을 한 차례 허락을 했다.

등운이 나중에 그 일에 대해 누이에게 소감을 묻자 월명이 대답하기를

 허공에다 장대를 휘두르는 것 같았다고 대답했다.

 

얼마 뒤 정욕의 포로가 된 부목이 또다시 관계를 요구해서 월명은 등운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오라비는 그렇게 원한다면 한 번 더 들어주어도 괜찮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중에 묻기를 이번에는 기분이 어떻더냐고 물었다.

월명이 대답하기를 마치 진흙땅에서 장대를 휘두르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부목에게 몸을 허락한 뒤 오라비가 묻자

월명은 마른 땅에 장대가 부딪치는 것 같았다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등운은 이런 일이 계속된다면 누이가 육신의 쾌락에 빠져 더 이상 수행을 못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래서 이렇게 일렀다. “저 부목을 죽이지 않으면 너는 영영 깨달음을 얻지 못할 것이다.” 애욕과 득도의 두 갈래 길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어느 날 두 남매는 부목을 아궁이에 떼밀어 넣어 불태워버렸다.

등운이 말했다. “사람을 죽이면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법. 이제 우리가 제도받는 방법은 성불하는 길뿐이다.”

그리고 두 남매는 그날부터 용맹 정진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한편 고기 맛(?)을 탐내다가 비명횡사하여 저승으로 간 부목은 염라대왕에게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호소하니

염라대왕이 저승사자를 보내 등운을 잡아오라고 시켰다.

하지만 그때마다 등운이 입선(入禪)중이어서 잡아올 수가 없었다.

등운은 부목을 죽은 경위를 자세히 써서 염라대왕에게 보냈다.

이것을 본 염라대왕은 등운 남매의 구도심에 감동하여 그를 용서하기로 작정했다.

 

부안과 만경 지방의 전설에는 등운이 도통하여 신출귀몰하는 재주로 세 차례나 저승사자를 헛걸음치게 만들으며,

나중에는 저승사자에게

공중에 모래로 새끼를 꼬아 나를 묶을 수 있다면 잡아가고 그렇지 못하면 잡을 수 없으리라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래서 저승사자는 끝내 등운을 잡아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부설거사의 존재는 원효성사와 의상조사 이후 신라불교가 왕실과 귀족 중심의 종교에서

서민을 위한 불교로 대중 속으로 보다 깊고 넓게 퍼져 들어갈 때에

재가불자로서 깨우침을 얻은 선구자라는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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